사기나 횡령, 배임 같은 경제범죄는 자본주의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보이스피싱이나 전세 사기 같은 범죄는 서민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도 한다. 정부와 검경이 경제범죄와의 전쟁에 나서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수법 탓에 피해 건수와 액수는 매년 늘고 있다. 조선비즈는 경제범죄를 심층적으로 파헤쳐 추가 피해를 막고 범죄 예방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편집자주]
우리은행 기업개선부서에서 일하던 전모(44)씨는 지난 2012년, 2015년, 2018년, 세 차례에 걸쳐 614억5214만원가량을 손에 넣었다. 평범한 은행 직원인 줄 알았던 전씨가 큰돈을 취한 것은 전씨의 재태크 실력이 뛰어나서도, 가족에게 거액을 상속받아서도 아니다. 전씨는 그가 속했던 우리은행이 한 외국 업체에 돌려줘야 하는 계약보증금을 빼돌려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전씨는 이 돈을 주가지수옵션 거래, 골프장 사업 투자 등에 썼다.
전씨의 횡령 사실을 알아챈 우리은행은 지난해 4월 27일, 전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수사를 마친 경찰은 같은 해 5월 6일, 전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등의 혐의로 법정에 오른 전씨에게 1심 재판부는 중형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4형사부(조용래 부장판사)는 지난해 9월 30일, 전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하고 추징금 323억여원을 낼 것을 명했다. 당시 재판부는 “614억원이 넘는 거액의 회사 자금을 횡령해 죄질이 불량하다”며 “범죄수익을 은닉하고 10년여에 걸쳐 횡령 자금을 소비하는 등 범행 후의 정상도 좋지 않다”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 전씨와 같이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에 넘겨진 전씨의 동생과 검찰 측이 각각 1심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현재 전씨에 대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시중 은행 직원들의 배임·횡령 사건이 끊이질 않고 있다. 금융업은 정부의 엄격한 관리·통제를 받는 규제 산업으로 신규 진입이 사실상 막혀 있다. 기존 은행들은 정부로부터 일종의 보호와 특혜를 받는 만큼 엄격한 내부 통제로 정부와 국민의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사법부가 금융권의 배임·횡령 사건에 중형을 선고하는 이유도 이런 인식 때문이다. 금융권과 법조계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범죄를 막기 위해선 은행 임직원의 도덕성에만 기댈 게 아니라 업무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서울 광진구의 한 농협 지점에서 일하던 김모(39)씨는 지난 2021년 49억3000만원가량을 대출받았다. 김씨는 농협 고객 37명의 명의를 도용해 큰돈을 빌릴 수 있었다. 김씨는 대출액 중 38억3420만원을 가족 명의의 계좌 등으로 빼돌렸다. 한 고객이 자신의 명의로 4500만원이 대출된 사실을 확인해 경찰에 신고하면서 김씨의 범행은 끝났다.
지난해 11월 25일 서울동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김병철 부장판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사기·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게 징역 9년을 선고하고 범죄수익금 중 16억4650만5000원을 추징할 것을 명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금융업 종사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고객 명의 등을 위조하는 방식으로 거액의 돈을 편취했다”며 “아직도 상당액의 돈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에 대한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은행 직원들의 배임·횡령은 비단 최근만의 일이 아니다. A씨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전북 전주시의 하나은행 모 지점에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고객들의 예금 입·출금 및 대출 등을 관리하는 업무를 했다. A씨가 마각을 드러낸 것은 2000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5년 1월까지 221회에 걸쳐 고객들의 예금통장에 있는 돈을 빼돌렸다. 그가 횡령한 돈은 50억3910만원, 그는 이 돈을 선물옵션 투자금 등으로 사용했다.
2014년 2월 6일 전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은택 부장판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의 횡령 금액, 범행 방법, 범행 횟수 등에 비춰 그 죄질이 중하다”며 “피고인이 오랜 기간 근무한 피해 은행과 고객들의 신뢰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 비난가능성이 높다”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
전문가들은 은행 직원들의 배임·횡령을 막기 위한 은행 내부의 업무 구조가 정비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정철 법무법인 우리 변호사는 “은행 직원들의 배임·횡령이 끊이질 않는 이유는 범죄가 발생해도 이를 감지하는 관리구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탓”이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고객 명의도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단순히 서류만을 확인할 게 아니라 실제 대출자의 의사를 유선 등으로 확인하는 이중 관리시스템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서 “범죄수익을 체계적으로 환수할 수 있는 제도의 정비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금융권에서 내부감시 및 자금세탁방지 등 업무에 일한 한 업계 관계자는 ‘레그테크(Regtech)’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첨단 레그테크를 도입해 금융권에 정착시키면 사람이 저지르는 배임·횡령의 90%가량은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그테크란 규제를 의미하는 레귤레이션(Regulation)과 기술을 뜻하는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합성어다. 복잡한 금융 관련 규제에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법규 준수를 돕는 신기술을 뜻한다. 고객확인(KYC·Know Your Service) 과정에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대표적인 범죄 예방을 위한 레그테크로 꼽힌다. OCBC은행, HSBC은행, 미쓰비시 UFJ 은행 등은 블록체인과 KYC를 결합해 개인정보를 다국적 네트워크에 분산 저장함으로써 개인 정보 보호를 강화한 기술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