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시각)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999년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73세 생일상을 받는 등 깊은 인연을 맺은 추억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영국 국가원수가 한국을 찾은 것은 두 나라 수교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왕의 방문이 한·영 관계에 물꼬를 트는 등 자양분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여왕은 1999년 4월 19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내외 초청으로 남편 필립공과 함께 3박 4일간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1883년 한·영 우호통상항해조약을 맺고 수교한 이래 영국 국가원수가 한국을 찾는 일은 처음이었다. 국민들도 ‘116년 만의 귀빈’을 환영했다.
특히 여왕은 73세 생일인 4월 21일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지금은 별세한 안동소주 명인 조옥화 여사가 마련한 생일상을 대접받고 축배를 들었다. 생일상은 과일·국수·편육·찜·탕 등 47가지 전통 궁중음식으로 구성됐다. 나뭇가지에 각종 꽃과 열매를 장식한 높이 60cm짜리 떡꽃 화분도 풍미를 더했다.
여왕은 안동에서 봉정사를 방문하는 한편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하고 고추장·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국 문화를 체험했다. 풍산 류씨 문중의 고택 충효당 방문 때에는 한국의 예법을 존중해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밖에 서울 인사동 거리와 이화여대를 찾아 한국 국민들과 직접 소통하는 소탈한 모습도 보였다. 여왕은 버킹엄 궁에 온 신임 주영 한국대사 등 한국 측 인사들에게 당시 기억을 언급하며 추억을 회자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왕은 당시 국빈만찬 답사에서 “오늘 본 한국은 왕위에 오른 1952년 당시 영국민이 알고 있던 한국과 많이 다르다”며 “새천년 시대를 바로 앞둔 이 시점에 이뤄진 방한은 양국관계의 힘을 상징하는 방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안동시는 여왕이 생전에 방문했던 하회마을 충효당 앞 구상나무 인근에 추모 공간을 마련할 예정이다. 구상나무는 당시 여왕이 방한 기념으로 심은 나무다.
여왕은 즉위 70년 만인 이날 스코틀랜드 발모랄 성에서 서거했다. 그는 영국 최장수 군주이자 세계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랜 기간 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