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경남 창원의 자주통일 민중전위(자통) 총책 황모씨 등 조직원들이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테가노그래피는 그림, 사진, 영상 밑에 비밀 문구를 숨기는 암호 기법이다. 특정 프로그램으로만 비밀 문구를 복원할 수 있기 때문에 북측이 ‘왕재산 간첩단 사건’ 등에서 공작원들과 소통하는데 주로 사용해왔다.

일러스트=정다운

◇ “변혁 위해 불타는 결의로 충만”… 스테가노그래피로 암호 전달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검사 이희동)는 전날 황씨 등 자통 조직원 4명을 국보법 위반과 범죄 단체 활동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기구인 문화교류국 공작원들과 캄보디아 등에서 접선해 공작금 7000달러(약 900만원)를 받고 국내에서 반미 투쟁, 정권 퇴진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검찰 중간 수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은 김명성 등 문화교류국 공작원들을 통해 2016년쯤부터 자통에 지령을 내렸다. 지령은 스테가노그래피로 비밀 문구를 암호화해 문서로 만든 뒤 외국계 클라우드(가상 서버)에 올려서 공유하는 방식으로 전달됐다.

예컨대 북한 공작원이 “서울 경기 지역에 새로 설립한 새끼 회사(자통 하부 조직)를 통해 새로 인입한 임원들이 충성심을 지니고 변혁 운동을 위해 한몸 다 바칠 불타는 결의에 충만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는 취지의 지시문을 작성하면, 지시문은 스테가노그래피 프로그램으로 암호화돼 압축 파일 등 위장 문서로 변환된다. 위장 문서가 외국계 클라우드 등에 공유되면 국내에서 수신한 뒤 다시 스테가노그래피 프로그램으로 복원해 지시문을 읽는다.

검찰은 북한이 이런 방식으로 자통에 ‘대남 혁명 전략 완수’ 관련 지령을 내렸다고 보고 있다. 북측은 지난 2021년 4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 대망론에 대응하거나, ‘태극기 부대를 사칭해 괴담을 유포하라’는 지령을 자통에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북한은 현 정부 출범 후에도 김일성·김정일 주의와 주체 사상을 이념으로 반미 투쟁과 정권 퇴진 활동을 지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1

◇ 왕재산 간첩단 사건 때도 등장, 北 지령 주고받아

스테가노그래피는 북한 지령을 받고 활동한 간첩단 왕재산의 사건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왕재산은 북한 대남 공작 부서인 노동당 255국의 지시로 지난 1993년 결성돼 국내에서 활동하다 적발됐다.

검찰이 당시 왕재산 조직원들로부터 압수한 휴대용 저장 장치(USB)에는 북측 암호가 신문 기사처럼 위장돼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왕재산 조직원들이 수사 기관의 추적을 피해 스테가노그래피로 숨긴 북한 지령 등을 외국계 이메일로 주고받았다는 게 당시 검찰 수사 결과였다.

왕재산 조직원들은 당시 군 관계자를 포섭하고 주요 시설 폭파를 준비하라는 지령을 북측으로부터 하달 받았으며, 방산 업체의 위치 정보 등이 담긴 위성 사진 등을 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당시 부장검사 이진환)는 지난 2011년 8월 왕재산 총책 김모씨 등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김씨는 대법원 3부(당시 주심 민일영 대법관)에서 지난 2013년 7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북한 255국 공작원과 접선해 국내 정세 동향을 보고한 혐의(국보법 위반)로 대법원 2부(당시 주심 김창석 대법관)에서 지난 2015년 5월 징역 5년이 확정된 전모 전 통합진보당 서울 영등포구 선거관리위원장도 스테가노그래피를 활용했다.

전씨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북한 255국과 산하기관의 공작원들을 중국과 일본에서 만나 지령을 받고 국내 정세를 북측 공작원에 보고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충성 맹세문을 스테가노그래피로 숨긴 뒤 북측과 미리 약속한 인터넷 웹하드에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요하네스 발타사르 프리데리시(Johannes Balthasar Friderici)의 1684년 저서에 소개된 스테가노그래피. 여러 개 창문을 여닫는 방식으로 "가루가 다 떨어졌다"는 메시지를 숨겼다. /위키커먼스

◇노예 머리에 새긴 암호… USB로 위장해 추적 피하기도

스테가노그래피의 어원은 ‘숨겨진(stegano) 기록(graphy)’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고대 그리스 왕들이 사용하던 고전적인 암호 기법이다. 그리스 왕들은 당시 밀서를 보낼 때 노예의 머리카락을 깎은 뒤 두피에 문구를 새긴 다음 머리카락이 자라서 문구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노예를 보내는 식으로 암호를 전달했다고 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2001년 9·11 테러를 준비하며 모나리자의 미소 사진 밑에 비행기 도면을 숨겨 알 카에다 조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식으로 스테가노그래피를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에는 북한 공작원들이 지령을 보낼 때 스테가노그래피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은 과거엔 단파(短波) 방송이나 난수표(암호문) 등으로 지령을 내리고 무전기, 팩스 등으로 보고를 받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며 스테가노그래피를 활용해 소통하고 있다. USB 등에 숨겨 의심을 피하고 수사 기관에 들켜도 비밀 문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북한 공작원들의 지령 전달 방법이 복잡해지며 수사 기관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 추적도 고도화하고 있다. 검찰 측은 “안보 사범은 위장해서 활동하기 때문에 증거 확보가 쉽지 않다”며 “압수수색이나 통신 자료 (분석) 같은 적법한 절차로 수집한 객관적 물증을 통해 범죄 증거를 밝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테가노그래피도) 비밀번호를 모르면 암호 해독이 불가능하다”며 “프로그램이 깔렸다고 전부 암호가 해독되는 것은 아니고 (비밀번호 등을 통해) 암호를 해독해야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