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이 구속기소된 이후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은 증인의 신문조서에 대해 재판부가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첫 번째 사례가 나왔다. 재판부가 기소 후에 이뤄진 검찰 조사의 증거능력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최 회장에 대한 혐의 입증도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24일 오전 최 회장에 대한 6차 공판기일을 열었다. 이날 재판은 지난 5월 25일 검찰이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과 조경목 SK에너지 대표 등을 기소한 후 처음으로 진행된 공판기일이었다. 재판부는 최 회장 사건과 조 의장 사건의 병합 여부 등을 결정하기 위해 공판기일을 미루고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해왔다.
이날 재판이 관심을 끈 것은 최 회장 기소 후에 이뤄진 검찰 조사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지에 대한 첫 번째 사례가 나왔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 3월 최 회장을 구속기소한 이후에도 SK네트웍스를 비롯해 SK그룹 관계자들을 추가로 검찰에 소환해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 진술조서 40개를 추가로 증거 신청하기도 했다.
이에 최 회장 측 변호인은 피고인이 기소된 이후 검사가 참고인을 불러 피고인에 대해 불리한 내용의 조서를 만들었다면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과거 파이시티 인허가 알선수재 사건 때 대법원이 이런 이유로 참고인의 진술조서 증거능력을 거부한 바 있다.
최 회장 사건 재판부도 비슷한 판단을 했다. 재판부는 지난 5월 20일 5회 공판기일에 “조서별로 특신상태에 대한 의견을 변호인 측이 제시하면 그때 그때 증거능력이 될지에 대해 판단하겠다”며 “검찰이 이렇게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법 조항대로 증명한다면 증거로 채택하겠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피고인을 구속까지 해놓고 지위가 불안한 사람을 불러서 받은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건 쉽지가 않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에 증인으로 출석한 A씨는 최 회장의 비서실에서 근무한 최측근 직원 중 한 명이다. A씨는 최 회장이 기소되기 전 두 차례 검찰 조사에는 참고인으로 소환됐고, 최 회장이 기소된 이후에는 피의자 신분으로 한 차례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최 회장 측이 증거능력을 문제삼은 건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를 받았을 때 작성한 신문조서였다.
A씨는 당시 조사에서 최 회장의 사위인 구데니스(구본철)가 최 회장의 개인 골프장 사업에 연루된 정황 등을 자세하게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최 회장이 개인 골프장 개발사업을 추진 중인 자신의 개인회사에 SK텔레시스 자금 155억원을 무담보로 대여(배임)했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A씨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강압이나 회유, 협박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A씨는 최 회장의 최측근으로 사실상 모든 일에 관여한 인물”이라며 “조사 과정에 변호인도 참여하고 영상으로 녹화도 하는 등 A씨가 자발적으로 진술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변호인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문제가 된 3차 진술조서를 작성할 때 A씨가 ‘특신상태’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특신상태는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법률용어로 특신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작성된 진술조서는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재판부는 구체적인 판단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A씨가 2차 조사 때까지는 참고인 신분이었다가 3차 조사를 앞두고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등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던 점 등이 재판부의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A씨에 대한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배제하고 검찰에 법정 증언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을 증명하라고 했다. 이후 A씨에 대한 검찰 신문이 시작됐지만, 신문조서의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최 회장 측 변호인이 반발해 재판이 지연되기도 했다.
재판부가 최 회장 기소 후 이뤄진 검찰 조사의 증거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임에 따라 최 회장의 범죄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검찰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을 떠안게 됐다. 재판부는 최 회장 기소 후에 이뤄진 검찰 조사 신문조서에 대해 건별로 증거능력을 판단할 계획인데, 대부분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법조계 관계자는 “최 회장에 대한 구속기간이 9월초에 만료되는 등 가뜩이나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수십여개 신문조서의 증거능력마저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검찰 입장에서는 불리한 상황에 처한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