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특례상장 제도로 국내 주식 시장에 입성한 기업들이 가상자산 트레저리(금고)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보유 기술을 활용한 사업이 실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유동성 위기를 겪거나 급기야 상장유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되자,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업을 전환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가상자산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 트레저리 사업이 부진한 주가를 부양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우려가 나온다. 기술특례상장 제도는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해 상장이라는 자금 조달 창구를 열어주는 제도다. 그런데 이 경로로 주식시장에 입성한 상장사가 인정받은 기술을 발전시키기보다 가상자산 축적에 몰두하면 기술특례상장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가상자산 기업이 기술특례 상장사를 우회상장 통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288330)와 비트맥스는 각각 본 사업인 신약 개발, 확장현실(XR) 기술 개발 외에 비트코인 트레저리 사업을 추진한다. 비트코인 트레저리는 기업이 준비금 일부를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으로 보유하는 것을 말한다.
비트코인을 약 50만개 사들인 후 주가가 급등한 나스닥 상장사 스트래티지가 비트코인 트레저리 사업의 대표적인 사례다.
브릿지바이오와 비트맥스의 공통점은 기술특례를 받아 상장했지만, 오랜 기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비트코인 트레저리 사업이다.
브릿지바이오의 경우 지난 3월 법인세비용차감전계속사업손실(법차손)이 자기자본의 50%를 넘으며 관리 종목에 지정됐다. 기술특례 상장사는 일정 기간(3년) 법차손 특례를 적용받은 이후 3년 이내에 2번 이상 법차손 비율이 50%를 넘으면 상장 폐지 위험이 발생한다. 매출 또한 지난해 기준 217만원에 그쳤었다.
그런데 지난 20일 미국 가상화폐 헤지펀드 파라택시스홀딩스의 펀드 ‘파라택시스 코리아펀드 1호’가 브릿지바이오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파라택시스는 2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고 전환사채(CB) 50억원을 배정받아 브릿지바이오에 총 25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당장 자본이 늘어나면서 법차손 비율이 50% 미만으로 내려가게 됐다.
상폐 위기를 벗어난 브릿지바이오는 주요 사업을 비트코인 트레저리 플랫폼으로 확장하기로 했다. 브릿지바이오는 이 소식이 전해지기 전인 지난 20일에는 20% 넘게 올랐고, 공시가 나온 후인 23일에는 가격 제한폭까지 올랐다.
비트맥스(옛 맥스트)도 2021년 기술특례상장 이후 매년 성적이 저조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빠르게 확장하던 XR 시장은 팬데믹(대유행) 종식 이후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실적도 악화됐다. 지난해 말까지 누적 영업손실이 140억원으로, 주가는 상장 당시의 20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
비트맥스는 지난 1월 메타플랫폼 투자조합에 인수된 뒤 트레저리 사업에 나섰다. 대규모 자금 조달을 통해 비트코인을 사들이고 있다. 현재까지 비트맥스가 확보한 비트코인은 25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주가도 지난달 1000원대에서 지난 20일 종가 기준 7110원으로 7배 이상 폭등했다.
투자 업계에서는 비트코인 트레저리 사업 확장이 상장폐지 위기에 몰린 기술특례 상장사가 비교적 손쉽게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회계사 A씨는 “법차손 문제는 단순히 매출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어렵고, 자본을 확충하는 방법뿐”이라며 “가상자산을 매입하면서 재고자산, 무형자산 등으로 상계하면 자본을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일부 기업이 의도적으로 주가를 부양하기 위해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사업을 홍보하는 경우 투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우려는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 같은 부작용을 우려해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를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현재는 국내 거래소에서 기업 명의의 계좌를 개설할 수 없다. 비트코인 트래저리 사업을 하는 국내 상장사는 대부분 해외나 장외에서 비트코인을 매입하고 있다.
해당 규제는 올해 말부터 순차적으로 완화될 전망이다. 당국은 순차적으로 비영리 법인, 상장법인, 전문투자자 등의 계좌 개설을 허용해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를 제도화할 예정이다. 우선 비영리법인, 가상자산 거래소의 계좌 개설이 허용되고, 상장사의 가상자산 거래는 시범적으로 허용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가 올해 말 합법화되면 시세 차익을 이익으로 잡는 것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즉 현재는 매출이 거의 없는 기술특례 상장사라도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 가격이 오르면 상장폐지를 피할 수도 있는 셈이다.
또 다른 투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경영난을 겪는 기술특례 상장사가 늘어나는 가운데, 해외 가상자산 투자자들의 국내 투자 문의가 늘어나고 있다”며 “올해 하반기부터 국내 법인도 가상자산 투자가 가능해지면 관련 테마주가 상당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브릿지바이오나 비트맥스와 같은 사례가 가상자산 기업의 우회 상장 루트가 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특히 바이오 분야 기술특례상장사의 경우엔 상장폐지 요건 중 하나인 법차손 이슈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