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유행 시기 발생한 자영업자의 빚을 조정·탕감하는 ‘배드뱅크’ 설립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금융 당국은 곧바로 배드뱅크 신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배드뱅크 필요성을 직접 언급했던 만큼, 빠른 속도로 정책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대 효과는 불분명하다. 과거 학계의 연구를 살펴보면 일회성의 채무조정은 자영업자 경제력 자활 측면에서 효과가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코로나19 대출 조정·탕감을 위한 배드뱅크 설립을 실무진 단위에서 준비하고 있다. 지난 5일 금융위는 개인채무자보호 감독규정 변경을 예고했다. 감독규정 변경안엔 비영리 법인의 채권 매입을 허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과거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 재임 시절 추진했던 주빌리은행처럼 시민단체가 부실채권을 매입해 소각하는 배드뱅크 모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동시에 금융위는 코로나19 대출 장기소액연체채권 규모 파악에 나섰다. 배드뱅크 설립 전 조정·탕감이 필요한 채무 규모를 확인하는 절차다.
코로나19 대출 조정·탕감은 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정책공약집과 TV 토론회 등에서 내세운 공약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TV 토론회에 나와 “국가가 부채를 감수하더라도 다른 나라처럼 코로나19 극복 비용을 정부가 부담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발표된 더불어민주당 대선 공약집에도 코로나19 대출 채무조정·탕감 특단 대책과 장기소액연체채권 소각용 배드뱅크 설치안 등이 담겼다. 공약집에는 “가계와 소상공인의 부담을 덜고 내수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의 설명이 담겼다. 자영업자의 빚 부담이 줄면 내수경제에 활기가 돌 것이라는 게 이 대통령의 판단이다.
◇ 과거 연구 결과 자영업자 채무조정 자활 효과 낮아
그러나 지금까지 이뤄진 학계의 연구 결과는 이 대통령의 기대와 어긋난다. 2022년 한국FP학회지에 실린 김성숙 계명대 교수·정운영 성균관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코로나19 유행 시기 개인채무조정 제도가 늘어났음에도, 자영업자의 채무조정 실효(失效·중도 탈락) 확률이 직장인보다 1.6배가량 높았다. 채무조정 대상이 되면 일부 원리금을 면제받는 대신 남은 빚을 갚아야 하는데, 이마저도 상환하지 못해 채무조정에서 탈락하는 자영업자가 많다는 뜻이다.
코로나19 유행 이전에도 자영업자 채무조정의 효과는 한계를 보였다. 2014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오윤해 연구위원이 펴낸 보고서에는 자영업자의 개인워크아웃 성공 확률이 직장인의 60% 수준이라는 연구 결과가 포함돼 있다. 이 보고서 역시 자영업자의 채무조정 실효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배드뱅크의 기대 효과대로라면 빚 부담이 줄어든 자영업자들이 경제력을 되찾아야 하지만, 앞선 연구들은 채무조정 혜택을 받은 자영업자들도 자활에 실패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개인채무조정에 초점을 맞춘 해외 배드뱅크 선례(先例)가 없다는 점도 정책 효과에 의문을 더하는 요소다. 해외 배드뱅크는 주로 금융사의 기업 여신에서 발생한 대규모 부실자산을 처분해 금융사의 건전성을 제고하는 목적으로 활용된다. 반면 이재명 정부의 구상처럼 특정 집단의 채무 탕감용 배드뱅크를 도입해 경기 부양에 성공했다는 사례는 없다.
전문가들은 배드뱅크가 자영업자 부실 부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김미루 KDI 연구위원은 “배드뱅크가 만들어지더라도 끊임없이 자영업자의 채무를 받아들이는 것은 도덕적 해이라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짚었다. 김 연구위원은 “자영업자 부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영업 과밀 현상에 있는 만큼, 채무조정 대상자들을 임금 근로자로 바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배드뱅크가 필요하다면 이 과정에서 제한적으로 운용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드뱅크(Bad Bank)란?
금융사의 부실 자산을 인수해 정리하는 전문 기관. 1988년 아메리칸 세이빙스 뱅크가 처음으로 배드뱅크 모형을 도입했다. 배드뱅크가 부실 자산을 전문적으로 정리하기에 기존 금융사는 우량 자산만을 보유해 건전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국내에선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배드뱅크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