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문화전문기자

콘텐츠 혁신을 이끈 디즈니의 전 회장 로버트 아이거는 자신의 경력이 외삼촌의 작은 부탁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그의 외삼촌이 맨하튼의 한 병원 입원실에서 만난 ABC 방송국의 하급 임원에게 ‘조카가 TV 방송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부탁한 것이다. 아이거는 이후 간단한 면접 채용 절차를 거쳐 촬영장의 잡무를 처리하는 ABC의 최말단 심부름꾼으로 미디어 세계에 발을 들였다.

‘디즈니만이 하는 것'이라는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밥 아이거가 이후 픽사와 마블, 루카스필름 등을 인수합병하는 과정에서 스티브 잡스, 에드 캣멀(픽사), 조지 루카스, 아이크 펄머티(마블)라는 당대의 거물들에게 보여준 인간적이고 겸손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비지니스 협상은 서로의 이익을 겨루는 테이블이지만, 아이거는 항상 디즈니가 혁신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당신들의 탁월한 콘텐츠와 창의적 조직 문화가 필요하다'는 부탁하는 마음을 유지했다.

나는 항상 부탁은 ‘저자세'이며 약자의 태도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로버트 아이거를 보면서 약자이냐 강자이냐에 상관없이, 누구나 성장이나 발전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부탁(진정성있는 요청)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출간된 책 ‘나는 왜 도와달라는 말을 못할까(어크로스)'의 저자인 미시간대 로스 경영대학원 조직경영학 교수 웨인 베이커는 ‘부탁이란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탁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 그럴까? 웨인 베이커 교수는 그 이유로 우리가 ‘타인이 나를 도울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면에는 거절당할까 두려운 마음, 더불어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하는지 파악이 안되는 욕구의 모호함도 깔려 있다.

낙관적인 소식은 ‘타인은 나를 돕지 않을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단정이 틀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타인은 나를 기꺼이 돕는다. 갤럽은 매달 전 세계 22억명의 인구가 도움이 필요한 낯선 사람들을 돕고 있으며, 인류학자와 언어학자로 구성된 국제팀의 또다른 연구는 매일 1057개의 부탁 가운데 90퍼센트 가량이 즉시 해결된다고 발표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부탁을 받으면 짐작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준다. 낯선 사람이 뉴욕 시민에게 휴대 전화를 빌리는 데는 평균 두 번의 시도면 족하다고 책의 실험 결과는 전한다.

한때 유행했던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할 때 온 우주가 나를 돕는다'는 말은 사실 신비체험이 아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에서 포인트는 ‘구하라'다. 그 첫 단계가 바로 기도로 신의 호의를 구하는 것이고, 다음 단계가 이웃에게 내 소망을 퍼뜨려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다. 사회적 생물로서의 인간은 타인의 요청을 들으면 반응하게 되어 있다. 타인을 도와 공헌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렬해서, 각자의 네트워크에 잠재된 자원을 채굴하고 적극적으로 순환시킨다.

낯선 곳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때마다 타인의 환대를 경험해본 여행자들이라면 인간의 친절이 내가 이 지구에서 누릴 수 있는 천혜의 자연자원이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부탁한다고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이렇게 운이 좋았던 거지?"라는 기적에 가까운 일들은 대체로 노력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홀연히 날아든 도움일 때가 많다.

부탁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무엇을 알며 누구와 연결되는지 알 수 없다. ‘도와달라'고 해야 솔직한 피드백, 신선한 정보, 새로운 해결책이 인맥의 다리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다.

부탁은 배워야 하는 행동이다.

고백하자면 나야말로 부탁할 때마다 진땀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지인에게 책의 추천사를 써달라거나, 유명인에게 인터뷰를 요청할 때, 심지어는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또래 친구들에게 시간을 비워달라는 부탁을 할 때조차 쩔쩔 맸다. 그러나 일단 입을 열고 나면 상대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고, 설사 성사되지 않더라도 납득할만한 이유를 알려주곤 했다. 성의를 보인다면 ‘부탁'은 밑져야 본전이거나 남는 장사였다.

내가 부탁을 힘들어하는 까닭은 특유의 방어적 비관주의와 폐 끼치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약간의 폐를 끼치고 호의를 베푼 사람과 더 가까워졌다. ‘기브 앤 테이크'를 쓴 애덤 그랜트는 가장 생산성이 높은 사람은 너그러이 베푸는 기버(giver)이면서 동시에 필요할 때 도움을 구하는 리퀘스터(Requester)라고 했다. 우리는 주는 것이 낫다고 배웠지만, 알다시피 가장 쾌적한 상태는 적당히 주고 받는 것이다.

부탁하고 부탁받아야 공동체가 돈독해지고 사용되지 않았던 묵은 자원이 유통된다. 이 ‘주고받음 순환 시스템’의 첫 바퀴를 작동시키는 엔진이 ‘도와달라고 먼저 손드는 사람’이다. 현명한 기버-리퀘스터로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왜 도와달라는 말을 못할까’의 저자 웨인 베이커 박사의 몇가지 조언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1 부탁하되 너무 의지하지는 마라 2 베풀 때는 조건 없이 베풀어라 3 장기적으로 베풀면서 부탁하는 사람이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