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편의점을 새로 내려면 기존 편의점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야 한다. 정부와 편의점 업계가 과당 경쟁을 줄이겠다며 마련한 '자율규약'의 핵심 내용이다. 또 폐업을 원할 경우 편의점주가 가맹본부에 내야 하는 위약금을 면제 또는 감경하는 방안도 마련된다. 하지만 업계 일부에서는 '신규 출점을 어렵게 함으로써 기존 편의점의 배만 불리는 것'이라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신규 출점 시 기존 편의점과 50~100m 이상 떨어져야

공정거래위원회는 4일 "편의점 업계의 상생을 위해 한국편의점산업협회가 요청한 '자율규약'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정위는 CU·GS25·세븐일레븐·미니스톱·이마트24·씨스페이스(C Space) 등 6개 편의점 업체와 함께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자율규약 이행 선포식을 가졌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이번 자율규약으로 편의점 시장에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율규약에 동참한 6개사의 점포 수는 국내 전체 편의점의 96%인 3만8000여개에 달한다.

정부와 편의점 업계가 과당 경쟁을 줄이기 위해 18년 만에 출점 제한 규정을 부활시켰다. 앞으로 편의점을 새로 내려면 기존 편의점과 50~100m 이상 떨어져야 한다. 사진은 바로 옆 건물에 자리잡은 서울 시내 편의점들의 모습.

자율규약은 '기존 편의점이 있는 곳에 신규 점포를 개설할 때 상권의 입지와 특성, 유동 인구 수, 담배 소매인 지정거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현행 담배사업법과 지방자치단체 조례는 담배 판매소 간 거리를 도시 50m, 농촌 100m로 정하고 있는데, 대다수 편의점이 담배를 팔고 있다는 점에서 편의점 간 거리에도 이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규 편의점 출점 시 기존 편의점과 50~100m 거리를 둬야 하며, 유동 인구가 많은 밀집 상권만 예외가 허용될 전망이다. 다만 현재 서울시는 담배 판매소 간 거리를 50m에서 100m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어서 향후 신규 편의점 출점이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폐점 부담은 줄어든다. 자율규약에서 편의점 업체들은 가맹점주 책임이 아닌 이유 때문에 경영이 악화돼 폐업할 경우 위약금을 감경 또는 면제해주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가맹점주가 보통 5년인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폐업을 원할 경우 운영 위약금과 인테리어 비용에 대한 시설 위약금을 부담해야 했다. 또 자율규약에는 '직전 3개월 적자가 난 편의점에 대해서는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영업을 하도록 본사가 강요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기존 점주 기득권 보장되고 권리금 올라갈 가능성

업계 일부에선 출점 제한 조치를 두고 '기존 업체나 점주들의 기득권을 정부가 보장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출점 거리가 제한되면 사실상 새로 편의점을 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편의점이 많아도 새 가게가 생긴다는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들어가도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계산이 있기 때문"이라며 "추가 개점이 없으면 기존에 편의점을 하던 점주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존 매장의 권리금이 올라갈 가능성도 크다. 편의점을 차리려면 기존 매장을 인수하는 것 말고는 사실상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담배 소매인 거리 제한을 기준으로 삼은 것도 논란거리다. 상권마다 사람들의 동선이 다르고 유동 인구가 다른데, 일률적인 기준으로 제한하는 것이 맞느냐는 지적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규제개혁위원회에서 담배 소매인 거리 제한 제도 폐지를 검토했으나, 거리 제한이 흡연 억제에 효과가 있다는 이유로 결국 폐지하지 않았다.

후발 업체들도 피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2017년 기준 CU는 1만2372개, GS25는 1만2293개, 세븐일레븐은 7568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니스톱은 2158개, 후발 업체인 이마트24는 1051개로 매장 숫자가 크게 차이 난다. 상위 업체들과의 매장 수를 좁히는 길이 사실상 막히는 것이다. 실제 이마트24의 경우 자율 규약을 만드는 과정 초기엔 참여하지 않다가 막판에 참여했다.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으로 업주들 불만이 커지자 현장조사 등으로 업계를 압박하며 본사로 화살을 돌렸다"며 "업계 입장에선 규제가 늘어나 불만이 많았지만, 워낙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여 버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애초 1994년부터 업계 스스로 80m 이내 출점 제한 협약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정위가 2000년에 담합이라며 이를 없애더니 이번에 다시 말을 바꿨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