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은 14일 실시된 정기 임원 인사에서 조현아 본부장을 상무B에서 상무A로, 조원태 팀장을 상무보에서 상무B로 각각 승진 발령하는 등 46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본지 12월15일자 보도

“상무면 다 상무지, 상무A는 뭐고, 상무B는 또 뭡니까?”

지난 14일 연말 정기 임원 인사를 단행한 한진그룹의 임원 승진자들에게 축하 전화를 건 외부 인사들이 인사말 끝에 내던진 질문이다.

상무A, 상무B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중공업현대백화점 등에서는 상무(갑), 상무(을)이라는 암호 같은 직급을 쓰고 있다. 상무A는 상무B보다, 상무(갑)은 상무(을)보다 한 직급이 더 높다. 도레이새한도 1999년부터 올 초까지 상무S(Senior) 상무J(Junior) 같은 직급 용어를 썼다. KT의 경우 상무, 상무보, 상무대우로 이어지는 3단계의 상무 직급 체계를 갖고 있다. 겉으로 부를 때는 '상무'로 통칭하지만, 엄연히 다른 계급이 3개나 있는 셈이다. 상무뿐만 아니라 전무나 부사장에 A·B나 J·S등급을 매기는 곳도 있다.

직급 단순화로 인한 진급공백 메우려 도입 

SK그룹은 아예 올 연말부터 상무·전무·부사장 같은 임원 호칭을 없애고 부문장·센터장·실장 같은 직책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직책 호칭과 직급 호칭을 서로 엇갈리게 사용하다 보니 혼동스럽다는 것이다. 대신 임원의 직급을 A~E 5단계로 나눠 연봉 등을 책정하는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A급 실장', 이렇게 부르기는 힘들 테니 자연스럽게 직책 호칭이 정착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의 임원 직급이 이처럼 다채로워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계기가 됐다. 그전까지는 어느 기업을 가든 ‘이사대우,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으로 이어지는 천편일률적인 임원 직급 체계였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 ‘글로벌 스탠더드’ 바람이 불면서 이런 전통적인 임원 직급 체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그중 하나는 초보 집행임원을 뜻하는 ‘이사(理事)’라는 호칭이 회사 내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Board of Director)의 ‘이사’와 같아서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재계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998년 6월 집행임원과 등기이사를 구분하기 위해 이사라는 임원 직급을 ‘상무보’나 ‘상무’ 등으로 바꿀 것을 회원사에 권고했다.

또 하나는 임원 직급이 너무 복잡하고 다단계여서 의사 결정이 느려진다는 비판이었다. 이사대우에서 사장까지 가는데 필요한 5~6단계, 그 아래 과·부장을 거칠 때의 2단계를 합치면 모두 7~8단계나 되는 결재 과정을 거치게 된다.

외국계 컨설팅사인 AT커니의 김근중 부사장은 “당시 대기업 중 상당수가 컨설팅을 통해 의사결정 구조를 대폭 단순화하는 쪽으로 임원 직급을 개편했다”며 “선진 외국 기업처럼 실무자와 중간 검토자, 최종 결정권자 등 3~4단계로 줄인 곳이 많았다”고 말했다.

맨 처음 임원 직급을 개편한 곳은 LG그룹이었다. LG그룹은 1998년 7월 상무보, 상무, 전무, 부사장 등으로 직급을 단순화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아예 상무보, 전무라는 직책을 없애 상무, 부사장, 사장으로 이어지는 3단계로 확 줄였다. LG그룹은 지금도 이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LG그룹에 이어 SK, 금호 등도 이사대우 등의 직급을 바꿨고, 삼성도 2001년 이사나 이사대우 대신 '상무보'라는 직급을 도입하는 행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렇게 임원 직급을 단순화하면서 생겨난 문제도 많았다. 임원이 된 이후 한 단계 진급하는 데 8~10년이 걸리는 일이 일어나면서 임원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조직이 활력을 잃는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무 중에 갓 진급한 상무도 있고, 10년 된 상무도 있는데 똑같은 상무예요. 부장 시절 평직원이나 대리였던 친구가 같은 상무를 하고 있으면 기분이 언짢죠. 임원 직급을 줄인 것이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하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우리 직장 문화에는 안 맞는 측면이 있습니다.”(4대 그룹의 한 고위임원)

또 연공서열형 인사가 일반화된 우리 사회에서 ‘진급’만큼 화끈한 보상책이 없다는 점에도 대기업들의 고민이 있다. 서구식으로 젊고 유능한 임원에게 파격적인 연봉으로 보상하는 일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조직에서 모든 임원에 이런 원칙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꼭 필요한 인재가 오랫동안 진급을 못 하면서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시 4~5년 정도에 한 번 진급하는 것이 기업 내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10년 내내 상무로 있으면 능력에 관계없이 회사 안팎에서 '무능한 인물'로 간주되기 십상입니다."(현대중공업의 한 임원)

글로벌 기준과 한국문화간 타협의 산물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많은 기업이 적절한 시기에 진급을 통해 임원에 대한 보상을 하는 쪽으로 임원 직급 체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2000년대 들어 상무 A·B, 상무 (갑)·(을) 등으로 상무 직급을 세분화하는 대기업이 속속 나오기 시작한 데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다. 상무 직급을 2~3단계로 쪼개 3~4년 단위로 진급시킴으로써 열심히 일한 임원에게 보상하고, 조직을 긴장시키는 효과도 내겠다는 뜻이다. LG그룹에서 분가한 GS·LS그룹은 2005년 분가하자마자 LG그룹에서 없앤 ‘전무’를 부활시켰다.

상무 직급을 세분화한 데는 대외적으로 직급 호칭을 상향시키겠다는 좀 더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이른바 ‘직급 인플레이션’이다. ‘이사대우’나 ‘이사’라는 호칭보다 ‘상무’ ‘전무’같은 호칭으로 불리면 밖에서 다른 회사 고위층을 만나 영업을 하거나 할 때 유리하다는 것이다.

대신 의사결정 구조는 더 복잡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를테면 A기업에 서울영업본부장이라는 직책이 있다면, 이 자리는 상무A든, 상무B든 누구나 맡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직급을 나눠도 의사결정 단계는 늘어나지 않는다.

전경련 고위관계자는 “상무 A·B, 상무(갑) 등의 암호 같은 직급의 등장은 결국 글로벌 스탠더드와 한국적 기업 문화 간 타협의 산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