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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애호가였던 러시아 황제 알렉상드르 2세(Alexander Ⅱ)는 다른 귀족들이 마시는 와인과 자신의 것이 구별되지 않는 게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1876년"차르(제정 러시아 황제의 칭호)만을 위한 샴페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주문을 받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와인업자 루이 로드레(Louis Roederer) 2세는 고심을 거듭했다. 최고급 포도를 골랐지만, 내용물만으론 부족했기 때문이다. 로드레는 크리스탈 수공업자에게 대형 샴페인 병을 특별 주문했다. 반짝이는 조각
에, 밑바닥은 평평하게 만들었고 병 주위에는 황제의 문양을 둘렀다. ' 차르의 샴페인' 크리스탈(Cristal)은 이렇게 탄생했다.

“차르 알렉상드르는 우리 회사 최고의 마케팅 매니저였죠. 광고는 물론 할인 판매도 안 하지만 전부 팔려나갑니다. 우리는 품질과 배급에만 신경 씁니다.”

22일 서울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난 프레데릭 루조 (Frederic Rouzaud·40) 루이 로드레 사장은 앳된 얼굴이었다. 머리에 무스를 발라 뒤로 넘겼고, 손목에는 메탈 시계를 찼다. 파리 도핀(Paris-Dauphine)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작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의 여덟 번째 ‘샴페인 가장(家長)’이 됐다. 230년 동안 가족경영을 이어온 루이 로드레 가문의 운명이 경영이론으로 무장한 신세대의 손에 달린 셈이다. 루조 사장은 와인을 논하면서 마케팅과 인수합병(M&A), 그리고 수요와 공급을 이야기했다. “ 다른 샴페인 제조회사들은 대부분 시장 수요부터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시장 수요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네 배는 더 생산할 수 있지만, 품질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실 수요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루이 로드레는 항상 수요가 공급보다 많기 때문이다. 작황이 나쁘면 일부 제품은 아예 생산조차 하지 않는다. 6년 숙성을 거치는 크리스탈은 2001년과 2003년 빈티지(생산연도)가 없다. 대신 루조 사장은 1400만병의 와인을 프랑스 랭스 본사의 카브(지하 저장고)에 쌓아두고, 매년 조금씩 시장에 푼다. 크리스탈은 국내에서 병당 50만원에 팔린다. 루조 사장은 넘쳐나는 현금을 고스란히 인수합병(M&A)에 투자한다. 작년 말 300년 전통의 샤토 피숑 랄랑드(Pichon Lalande)를 인수할 때는 거대 명품기업 에르메스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 루조 사장은“한 시간 만에 승부가 결정났다”고 했다.

"에르메스는 우리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제시해서 유리했지요. 그런데 에르메스가 계약을 좀 끌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가족들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서 마지막 의견을 물어보고, 연내에 모든 걸 마무리 짓는 조건으로 다시 제안했죠. 결국 우리가 선택됐습니다."

루조 사장은 작년 초 한바탕 설화(舌禍)를 치렀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와의 인터뷰였다. 대표상품인 크리스탈이 쇼 비즈니스의 대명사처럼 비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미국
힙합가수들 사이에서 크리스탈을 수백병씩 주문해 파티를 여는 것이 부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

루조 사장은 “어쩌겠느냐. 사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What can we do? We can’t forbid people from buying it)”고 대답했다. 기사가 나가자 힙합 업계는 즉각 반발했다. 가수 비욘세의 연인인 힙합 가수 제이지(Jay-Z)는“인종차별주의자”라는 성명을 내고 대대적인 불매운동을 벌였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만, 루이 로드레는 오히려 몸값이 올랐다. 미국 시장에서 허영과 방탕함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던 크리스탈 브랜드를 영리하게 원래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루조 사장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무척 조심스러워했지만,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사진=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 당시 인터뷰에서 어떤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나요?

" 기자가 발가벗은 댄서 몸에 크리스탈을 내리 붓는 힙합 뮤직비디오를 보여주었어요. 그러면서 '이래도 괜찮은가'라는 취지로 물었고, 전 그에 대답을 했을 뿐입니다."

- 의도가 잘못 전달됐다는 뜻인가요.

" 글쎄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진행됐다고 할 수 있죠. 정성 들여 와인을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사람 몸에 뿌리는 것보다는 글라스에 따라 마시는 모습을 보는 게 더 행복합니다. 샴페인에 파티와 즐거움이라는 환상이 겹쳐져 있는 건 사실입니다. 러시아 차르도 샴페인 잔을 등 뒤로 '휙'하고 집어 던지며 놀곤 했다는데, 일단 샴페인을 마신 후에 한 겁니다."

- 힙합 가수들의 불매 운동 이후에 변화가 있었나요.

" 일단 판매량이 늘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들이 뮤직비디오를 보고 '루이 로드레가 스폰서를 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건 이후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밝혀졌습니다. ' 오해했다. 다시 크리스탈을 마시겠다'고 메일을 보낸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 230년 역사 동안 고비가 많았던 것 같은데요.

" 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이어 1930년대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파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증조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증조할머니가 경영을 맡게 됐어요. 증조할머니는 깨진 접시를 모아 놓고 종이 한 장도 아낄 정도로 절약하면서 회사를 살려냈습니다. 가문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죠."

- 그리고 나서 당신의 아버지 장 클로드(Jean-Claude) 루조 씨가 회사를 도약시켰죠. (장 클로드 루조는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와 로
드레 가문의 일원이 됐고, 로드레 가문은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 아버지는 철저한 원칙론자였습니다. 1974년 빈티지에서 코르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냥 덮어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80만병을 전부 수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버지의 꿈은 단순
히 와인을 많이 파는 회사가 아니었어요."

- 엄청난 성공을 거둔 아버지도 언론 인터뷰에서 "조금 더 공격적으로 경영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는데요.

" 아버지는 항상 샴페인에 대해 회의적이었어요. 언제나 그랬죠.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1990년 걸프전 때 세계 샴페인시장이 위축되고 가격이 떨어질 때 아버지는 투자를 크게 늘리지 않았지요. 그동안 경쟁회사들은 시장을 키워가며 바짝 따라왔죠."

- 당신은 당시 어땠습니까?

" 저는 굉장히 적극적이었습니다. 자체 소유 밭에서 생산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고, 오랫동안 해온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품질만 유지하면 (사업을 확대해도) 문제 없다고 생각했지요."

- 미국에 이어 영국에서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을 생산할 토지를 물색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 영국의 시원한 지방에서 좋은 와인을 기를 수 있을까 해서 가봤습니다. 온난화 때문이지요. 켄트와 서섹스 지방에 갔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추진할지는 미정입니다."

- 영국에서 생산하면 샴페인이라고는 부르지 못하죠.

" 못 부르죠."

- 스파클링 와인 때문에 샴페인은 사라지게 될까요?

" 사실 스파클링 와인 때문에 샴페인의 미래는 더 밝습니다. 스파클링 와인을 많이 마시다 보면 샴페인의 디테일, 마법 같은 균형감에 대해 잘 알게 되고, 더 많이 찾게 되니까요."

- 루이 로드레가 '샴페인'이라는 명칭에서 덕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샴페인이라는 명칭을 보호했기 때문에 프랑스 와인기업들이 이득을 본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명칭을 보호하기 이전에도 샹파뉴 지방은 오랜 세월 동안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샹파뉴 지방에는 3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샴페인 생산업체가 있다. 루이 로드레는 독립 가족기업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 내년 2월이면 샴페인 원산지가 확대되는데, 어떤 영향을 받을까요.

" 현재 샹파뉴 지방 포도밭은 총 3만3000헥타르인데, 앞으로 10년 동안 1500헥타르를 더 늘릴 계획입니다. 한 4% 정도인데, 굉장히 작은 규모이지요."

- 샴페인 시장에서 다국적 기업에 위협을 느끼나요?

" 다른 대기업들이 샴페인 파는 방법은 위스키를 파는 것과 비슷해요. 마케팅과 홍보에 너무 많은 돈을 쓰죠. 또 주주가 있기 때문에 '올해는 작황이 안 좋으니 조금만 생산하겠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M&A에서도 기동성이 떨어집니다."

- 아버지는 '사주 드 랭스(Sage de Reims·랭스의 현자)'라고 불렸는데, 당신은 30년 뒤에 뭐라고 불리고 싶나요?

" 파 사주(pas sage·악동)라고나 할까요?"(불어에서 'sage'는 '현자'와 '얌전하다'는 뜻이 함께 있다. 루조는 여기에 부정문에 쓰이는 'pas'를 붙여 '악동'쯤 되는 뜻으로 대답했다.)

- 악동이라…. 무슨 뜻인가요?

" 하하 농담입니다. 제 꿈은 세계 각지의 가장 좋은 원산지를 모아서 최고급 와인을 만드는 거예요. 아버지가 시작한 사업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인생에서 큰 성공을 거뒀을 때 '샴페인을 터뜨린다'고 하는 데 준비해 놓은 샴페인이 있나요.

" 카브 깊숙이 1990년산 크리스탈 말투잘렘(6L짜리병)을 하나 넣어 놓았습니다. 절대 혼자 마실 수 없는 양이죠."

- 언제 터뜨릴 건가요?

" 아직 모르겠습니다."

- 그럴 만한 이벤트가 있을 텐데요.

“…. 잘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꼭 샴페인을 터뜨려야 하는 일이 생기겠죠.”

악마의 와인, 황제의 술…
'샴페인'은 아무나 붙이나

■ 스파클링 와인과 샴페인의 관계

고형욱 와인칼럼니스트·쉐벵상 대표

스파클링 와인은 ‘기포가 있는 와인’을 뜻한다. 그중 가장 유명하며 원조 격인 것이 바로 샴페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두 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샹파뉴(Champagne) 지방을 영어식으로 읽어 샴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되어야만 샴페인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프랑스 내 다른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스파클링 와인은 크레망(Crem ant)이라고 부른다. 부르고뉴, 알자스, 보르도 등 여러 지역에서 크레망이 나온다.

샹파뉴의 중심지 랭스는 프랑스 역대 왕들이 대관식을 올리던 도시였으며, 중세부터 정기 시장이 열리면서 부를 쌓은 지방이었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은 미사를 위해 자체적으로 와인을 생산했다. 날씨가 추운 샹파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던 와인은 봄에 온도가 올라가면 종종 병이 폭발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사람들은 이를 ‘악마의 와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온도가 변화하면서 급속도로 발효가 이루어진 까닭이었다. 수도사들은 발효 과정을 통해 기포를 발생시키는 방법을 알게 됐다. 그런 스파클링 와인을 잘 보관하기 위해 코르크를 쇠줄로 고정시키고, 보다 견고한 병을 사용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샴페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거품이 솟아오르는 샴페인은 사람들에게 환상과 아름다움을 심어주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은 “여자가 마셔도 유일하게 추해지지 않는 와인은 샴페인”이라면서 와인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나폴레옹은 모엣 샹동 셀라에 방문하면서 족적을 남겼고, 알폰스 무하 같은 아르누보 화가는 지금 봐도 멋들어진 포스터를 그렸다. 러시아 차르 알렉상드르 2세는 자신만을 위해 크리스탈을 만들게 했으나 왕정이 무너지면서 부르주아들의 차지가 되었다. 동 페리뇽 로제도 이란 황제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니 인근에서 캐비아가 나는 나라들의 권력자들은 샴페인의 비공식적인 후원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샴페인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명품 기업 LVMH는 모엣 샹동, 크룩, 뵈브 클리코라는 세 군데의 샴페인 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루브르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기증한 것도 샴페인 회사 포므리였다. 시원하게 파도를 가르는 아메리칸 컵 요트 대회, 모든 자동차 마니아들을 열광케 하는 F1 레이스, 파리 주요 박물관에서 열리는 대형 전람회들도 샴페인 회사에서 후원하곤 한다. 오프닝 세러모니에서 혹은 승리를 거둔 우승자들이 받는 샴페인 세례는 그야말로 축하 그 자체임을 느끼게 해준다.

전 세계의 많은 와인 생산자들이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어서 샴페인이라는 이름으로 팔곤 했다. 샴페인은 고급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사업성을 알고 덩치를 키운 샴페인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고향이자 자신들만의 와인 이름을 남들이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교 라인을 총동원해서 샴페인이라는 이름의 독점권을 확보했고 다른 지방, 다른 나라의 스파클링 와인은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도록 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오드리 헵번)는 노천 카페에 앉아서 샴페인 한 잔을 주문한다. 따사로운 오후에 가볍게 마시기에는 안성맞춤이었으리라.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난한 로마의 평범한 카페에서 샴페인까지 구비한다는 것은 무리였을까. 대신 나온 것은 저렴한 스파클링 와인인 스푸만테(Spumante)였다. 이탈리아에는 스푸만테 외에 무난히 마실 수 있는 발포성 와인 모스카토 다스티(Moscato d’Asti)도 있다. 스페인에서는 바르셀로나 인근에서 스파클링 와인이 많이 나온다. 셀라라는 말에서 유래해서 카바(Cava)라고 부르곤 한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은 젝트(Sekt)라고 부른다. 솟아오르는 거품만으로도 호사스러운 스파클링 와인 붐은 신대륙으로도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1892년부터 발포성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시장성을 간파한 모엣 샹동, 루이 로드레, G. H. 멈, 태탱제 같은 대형 샴페인 하우스들이 노하우를 갖고 진출해 있다. 많은 이들을 황홀한 분위기로 빠져들게 하는 거품이 만들어내는 위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