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파는 질량을 가진 물체가 가속 운동할 때 시공간에 생기는 잔물결 같은 파동이다.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15년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존재를 예측했지만 100년 뒤인 2015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관측됐다. 천문학자들은 그 뒤로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처럼 질량이 큰 두 천체가 합쳐지는 병합 현상을 비롯해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새로운 중력파 천문학의 시대를 열었다. 중력파를 함께 연구하는 국제 공동 연구진이 지금까지 관측된 것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의 블랙홀 병합 현상을 포착했다. 과학자들은 수년 내 블랙홀 형성과 관련한 현대 천문학 이론을 수정할 날이 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중력파를 검출하는 국제적인 과학자 조직인 라이고(LIGO·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비르고(VIRGO)-카그라(KAGRA·카미오카중력파검출기)협력단은 14일(현지 시각)부터 18일까지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제24회 일반 상대성 이론 및 중력 국제 학술 대회(GR24)와 제16회 에도아르도 아말디 중력파 학술대회에서 지난 2023년 11월 미국에 있는 두 곳의 라이고 관측소에서 중력파 관측 이후 가장 무거운 블랙홀 병합을 감지했다고 공개했다.
이번에 가장 무거운 블랙홀 충돌을 감지한 라이고 관측소는 미국의 루이지애나주 리빙스턴과 워싱턴주 핸퍼드에 설치된 시설이다. 캘리포니아공대(캘텍)와 매사추세츠공대(MIT) 주도로 운영되는 이 시설은 지난 2015년 9월 14일 시공간의 파동인 중력파를 최초로 직접 감지하며 천문학의 역사를 다시 쓴 시설이기도 하다. 당시 중력파는 태양 질량의 30배에 이르는 두 개 블랙홀이 합쳐지면서 태양 질량의 62배에 이르는 거대 블랙홀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라이고 연구자들은 이 최초의 중력파 관측 이후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이탈리아의 비르고 검출기와 일본의 카그라 검출기와 공동 관측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 검출기는 블랙홀 충돌 같은 격렬한 우주 사건으로 발생한 시공간의 미세한 왜곡을 측정할 목적으로 설치됐다.
‘GW231123’으로 명명된 이 신호는 2023년 11월 23일 이뤄진 라이고-비르고-카그라 네트워크의 네 번째 관측(O4) 기간에 포착됐다. 연구진은 은하수 가장자리 너머에서 두 개의 거대 블랙홀이 나선형으로 충돌하면서 시공간에 파동이 발생하는 현상을 감지했다.
신호를 분석한 결과, 충돌 후 새롭게 생성된 블랙홀은 태양 질량의 225배가 넘는 것으로 분석됐다. 두 블랙홀은 서로의 주위를 맴돌다 지구에서 약 23억~134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충돌하면서 이 거대 블랙홀을 형성한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이번 충돌은 중력파 검출이 시작된 이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블랙홀 병합”이라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가장 큰 블랙홀 합병은 2021년에 발생한 GW190521 사건이다. 당시 충돌로 생겨난 블랙홀은 태양 질량의 140배에 이른다. 이번에 병합된 블랙홀들은 이전에 관측된 블랙홀보다 훨씬 컸다. 충돌 전 블랙홀들도 태양 질량의 100배가 넘는다. 실제 분석 결과 각각 태양 질량의 103배와 137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블랙홀은 보통 거대한 별이 죽고 수명이 다해 붕괴할 때 형성된다. 엄청난 밀도의 천체는 시공간을 휘게 만들어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 병합된 블랙홀은 늙어가는 별이 붕괴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큰 편이다. 충돌 전 두 블랙홀은 또 지구보다 40만배 빠르게 자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중력파를 동반한 대부분의 블랙홀이 상당히 느리게 회전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연구진은 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면서 무거운 블랙홀은 기존의 표준 항성 진화 모델로는 설명이 어렵다고 말했다.
협력단 일원인 마크 해넘 영국 카디프대 교수는 “이 블랙홀들의 질량은 노화하는 별에서 직접 붕괴해 형성됐다고 보기에는 너무 커서 과거에 더 작은 블랙홀들이 합쳐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아마도 여러 차례의 블랙홀 병합이 앞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우주에는 항성 질량의 블랙홀과 태양 질량의 100만배 이상인 초거대질량 블랙홀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반면 우리 은하와 같은 은하 중심부에서 발견되는 초거대질량 블랙홀이 초기 우주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태양 질량의100~10만배에 해당하는 중간 질량 블랙홀도 잘 발견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번에 포착된 블랙홀의 속도와 질량 특성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잇따라 발견되고 있는 중간 질량 블랙홀이 은하의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비코카대 다비데 게로사 교수는 영국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와 인터뷰에서 “10년 전만 해도 태양 질량의 30배의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면서 “이제는 태양 질량의 100배가 넘는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며 놀라고 있다”고 말했다.
크고 빠르게 회전하는 블랙홀에서 발생한 중력파는 작은 블랙홀에서 발생한 중력파보다 감지하기 더 어렵다. 이번에 포착된 블랙홀의 병합은 이례적으로 큰 질량과 극도로 빠른 회전 속도를 보이며 현재의 중력파 검출 기술과 이론 모델의 한계를 드러냈다.
찰리 호이 영국 포츠머스대 교수는 “이 블랙홀은 일반상대성 이론이 허용한 한계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며 “신호를 모델링하고 해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론 개발의 필요성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향후 고속 회전 블랙홀의 복잡한 역학을 설명하려면 이번 관측과 유사한 극적인 관측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블랙홀이 어떻게 커졌고 왜 그렇게 빠르게 회전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라이고 관측소는 중력파가 지나갈 때 시공간에 발생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장치다. 관측소에는 길이가 4㎞인 두 개의 거대한 진공관이 뻗어 있다. 진공관 양 끝에는 거울이 있고 그 사이를 레이저 빔이 300회를 오가며 약 1000㎞를 이동한다. 시공간의 파동인 중력파가 지나가면 진공관이 휘면서 레이저 빔이 날아가는 거리가 약간 바뀌는데 그 과정에서 두 빔의 파동이 서로 상쇄하는 간섭 현상이 발생한다. 레이저 검출기 이때 나타나는 깜박임으로 중력파의 존재를 포착한다.
과학자들은 중력파 검출기가 개발되기 전까지 가시광선과 적외선, 전파와 같은 전자기파로만 우주를 관측했다. 사람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으로는 별 온도와 질량, 밝기, 화학 성분, 은하 모양과 구조를 알 수 있었다. 적외선은 먼지와 가스 구름에 가려진 천체, 별이 탄생하는 영역, 은하 중심부처럼 빛이 통과하지 못하는 천체를 관측하는 데 유용하다. 중력파는 빛이나 전자기파를 방출하지 않는 블랙홀과 같은 천체를 탐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중력파와 전자기파를 함께 관측하면 중력파의 진원지 위치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고 천체 현상의 물리적 특성을 자세히 연구할 수 있다. 이창환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는 지난 2018년 고등과학원의 정기학술지 호라이즌에서 “중력파가 검출되면서 본격적인 다중 신호 천문학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실제 라이고 검출기를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더 많은 블랙홀 병합이 발견되고 있다. 중력파 검출기들은 지난 2015년 첫 관측 시작 이후 현재까지 약 300회의 블랙홀 병합을 관측했다. 네 번째 공동 관측은 2023년 5월에 시작됐는데 이 기간에만 200회 이상의 블랙홀 병합이 관측됐다.
지난 2017년 노벨 물리학상은 첫 중력파 검출에 이바지한 라이너 바이스 MIT 명예교수와 배리 배리시 칼텍 명예교수, 킵 손 칼텍 명예교수에게 돌아갔다. 과학자들은 중력파 검출기들이 지금보다 더 큰 블랙홀 충돌을 포함해 더 많은 신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넘 교수는 “10~15년 내 우주의 모든 블랙홀 병합 현상을 관측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어쩌면 예상하지 못한 우주 현상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중력파 연구는 과학 외교와 첨단 산업 기술의 시험장이 되고 있다. 현재 라이고 협력단에는 전 세계에서 16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관측과 분석에 참여하고 있다. 유럽 중력파 관측소(EGO)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비르고 협력단에는 17개국 152개 기관에서 일하는 과학자 약 880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 피사 근처에 비르고 검출기를 보유하고 있다. 카그라는 일본 기후현 가미오카시에 설치된 3㎞ 길이의 레이저 간섭계이다. 협력단에는 17개국, 128개 기관의 과학자 400명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도 독자 관측소는 없지만 라이고와 비르고, 카르고 협력단에 한국천문연구원과 고등과학원, 이화여대 등 여러 연구기관과 대학이 참여하고 있다.
중력파 천문학은 통신과 제조, 의료에서 사용하는 첨단 광학과 레이저 기술, 정밀 측정과 계측 기술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중력파 관측소만 해도 지진과 환경 소음 영향을 받지 않는 첨단 진동 감쇠와 초고진공 기술이 적용된다. 최근에는 중력파 감지 장치에서 생성된 막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데이터 분석 기술과 머신러닝,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도입되면서 경제적 가치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과학계 일각에선 지난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라이고 시설의 절반을 폐쇄하는 방안을 발표한 것과 관련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중력파 검출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내는 라이고 시설 절반을 폐쇄하면 새로운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전했다.
참고 자료
arXiv(2025), DOI : https://doi.org/10.48550/arXiv.2507.08219
Nature(2025), DOI : https://doi.org/10.1038/d41586-025-022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