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에서 많이 발생하는 희소 혈액암을 국내 면역항암 신약이 정복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환자가 적어 글로벌 제약사들이 외면했는데, 최근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잇따라 신약 개발에 나서 성과를 보였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희소 혈액암인 ‘NK(자연살해)-T세포 림프종’ 치료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질환은 아직 표준 치료법이 없고, 2년 내 재발률이 80%에 달할 정도로 치료가 어렵다.
국내 기업들은 시장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고 선점 효과가 크다고 보고 있다. 동양인에서 흔한 바이러스 감염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임상시험에 참여할 환자를 국내에서 구하기가 유리하다. 미국·유럽·한국 등 주요 규제 기관들이 이 질환을 희소 질환으로 지정하고 있어, 신약을 개발하면 임상 2상 시험 결과만으로 신속 허가를 받을 수 있다.
NK-T세포는 표적을 직접 파괴하는 자연살해(NK)세포와 표적과 결합하는 T세포의 특성을 모두 가진 면역세포이다. 말하자면 정찰과 전투 능력을 겸비한 특급 전사인 셈이다. T세포의 1%를 차지한다.
NK-T세포에 생긴 혈액암인 NK-T세포 림프종은 전 세계 인구 10만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희소 질환으로, 진행 속도가 빠른 치명적인 암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혈액암은 림프절에서 많이 발생하지만, NK-T세포 림프종은 림프절 바깥인 비강(코), 안와(눈 주위), 피부, 장 등 다양한 조직에서 발생한다.
NK-T세포 림프종의 가장 큰 발병 원인은 앱스타인-바 바이러스(EBV) 감염이다. EBV는 헤르페스 바이러스 계열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인구의 90% 이상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 대부분 어릴 때 처음 감염되는데, 일부에선 바이러스가 면역세포를 변형시켜 암을 유발한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EBV를 1급 발암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현재까지 개발된 치료제는 중국 시스톤(CStone)이 2023년 10월 말 중국에서 승인받은 ‘씨젬리(성분명 수게말리맙)’가 유일하다. 다만 씨젬리의 효능이 제한적이어서 새로운 치료 선택지가 필요한 상황이다. 치료 대상 질환이 가장 많은 미국 머크(MSD)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조차 이 암종에 대해서는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만큼 글로벌 제약사들도 진출하지 못한 틈새시장으로 평가된다.
한국은 EBV 감염 환자가 많아 NK-T세포 림프종 치료제 개발에 유리하다. NK-T세포 림프종은 전 세계에서 10만명당 1명 꼴로 발생하지만, 국내에선 EBV 감염률이 높고 연간 약 100명 정도의 환자가 발생한다. 그만큼 환자 확보가 쉬워 글로벌 임상시험보다 비용을 줄이면서 국내 임상으로도 충분한 데이터 확보가 가능하다.
국내에서 치료제 개발이 가장 앞서 있는 곳은 바이젠셀(308080)이다. 바이젠셀의 면역항암 세포치료제 후보물질 ‘VT-EBV-N’은 2019년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이어 2023년 유럽의약품청(EMA)으로부터 희귀 의약품 지정을 받았다.
바이젠셀은 2023년 9월 임상 2상 시험에서 환자 48명에 VT-EBV-N 투약을 마치고, 현재 2년 동안 환자들의 경과를 관찰하고 있다. 회사는 오는 9월 임상 2상 결과가 나오면 식약처에 조건부 허가를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유한양행(000100)의 자회사인 이뮨온시아(424870)도 면역항암 신약인 ‘IMC-001’을 개발 중이다. 최근 공개한 임상 2상 중간 결과에서 암이 줄어든 환자의 비율인 객관적 반응률(ORR)이 79%로, 중국의 씨젬리(46.2%)보다 우수한 효능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뮨온시아는 올 하반기에 식약처에 희귀 의약품 지정을 신청할 예정이다. 현재 진행 중인 2상 투약은 내년 중 완료된다.
이밖에 유틸렉스(263050)는 ‘앱비앤티’의 임상 2상, GC녹십자(006280) 계열사 지씨셀(144510)은 지난 3월 면역항암제 ‘GCC2005’의 1상 투약을 시작했다.
국내 기업이 NK-세포 림프종 면역항암제로 희귀 의약품 허가를 받으면 시장에서 독점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임상 2상 후 조건부 허가를 통해 비교적 빠르게 시판해 시장 독점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이전 가능성도 크다. NK-세포 림프종은 특히 동아시아에서 환자 발생률이 높아 중국 기업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적용 질환을 고형암으로 확장해 시장을 키울 수 있다. 실제로 이뮨온시아는 IMC-001를 통해 NK-T세포 림프종 치료제 시장에 진입한 뒤, 적용 범위를 일반 장기에 걸린 고형암으로 넓히겠다고 밝혔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고형암에 대한 임상 2상 시험도 진행 중”이라며 “NK-T세포 림프종 치료제로 허가받은 뒤 고형암 전반으로 면역항암제 시장을 확대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