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동물은 덩치 큰 맹수가 아니라, 길이 1㎝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곤충, ‘모기’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매년 약 72만명이 모기가 옮기는 감염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중 60만명 이상이 말라리아 감염자다. 대부분 아프리카 저개발 국가의 어린이들이 희생된다.
국내에도 말라리아 비상이 걸렸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번식하는 말라리아 매개 모기는 최근 기온 상승과 맞물려 국내에서도 활발히 퍼지는 양상이다. 덩달아 말라리아 유행기도 빨라지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 1일 파주시에 올해 첫 말라리아 경보를 발령한 데 이어 8일 고양시와 연천군에도 말라리아 경보를 발령했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국내 업체들이 말라리아 진단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유사시 대비가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해외에서 백신과 치료제도 다양하게 개발돼 있어 일찍 진단하면 대규모 감염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퍼지는 말라리아에 듣는 새 백신도 개발 중이다.
◇감염자 2023년부터 700명대로 급증
9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1년 294명이었던 국내 말라리아 환자가 2022년 420명, 2023년 747명으로 급증했다. 지난해는 713명이 감염됐다. 기후변화로 모기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지면서 말라리아 감염 위험도 커지고 있다.
올해 말라리아 감염 환자는 지금까지 240명이 나왔다. 말라리아가 7~9월에 유행한다는 점에서 올해도 환자가 많이 나올 것으로 예측된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2~26주차(5월 25일~6월 28일)에는 전국 말라리아 감염 환자가 20명대에 머물렀지만, 폭염이 시작된 27주차(6월 29일~7월 5일)에는 2배 수준인 41명으로 급증했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번식하는 말라리아 매개 모기는 최근 기온 상승과 맞물려 국내에서도 활발히 퍼지는 양상이다. 특히 통상 7~9월 사이에 유행하던 말라리아가 최근 들어 더 일찍,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mRNA 백신, 유아용 치료제 나와
말라리아는 모기가 옮기는 기생 원충이 유발한다. 모기가 사람 피를 빨면 침과 함께 사람 몸에 들어간다. 원충은 간에서 잠복기를 보내며 증식한 뒤 적혈구로 침입해 오한·발열·설사·두통·근육통 등을 일으킨다. 뇌에 침투하면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말라리아를 막기 위해 1940년대부터 백신을 개발했지만, 세계보건기구(WHO)가 승인한 백신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모스퀴릭스’와 옥스퍼드대의 ‘R21’ 단 두 개뿐이다. 각각 2021년 2023년 승인받았다.
두 백신 모두 말라리아 원충의 단백질(항원)을 인체에 주입해 이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드는 면역반응을 유도한다. 하지만 둘 다 아프리카에서 유행하는 열대열 말라리아를 대상으로 개발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는 삼일열 말라리아에는 효과가 없다. 최근에는 여러 곳에서 삼일열에 대응할 수 있는 예방 백신을 개발 중이다.
기존과 다른 방식의 백신도 개발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은 마이크로 캡슐에 백신을 담아 기존 백신 주사제에 추가했다. 캡슐에 든 백신은 천천히 흘러 나와 추가 접종 효과를 낸다. 기존 백신은 2~3회 주사를 하지만 이 방식은 1회면 끝난다. 현재 사람 대상 임상시험을 준비 중이다.
독알 바이온텍과 미국 조지워싱턴대 연구진은 원충 단백질 대신 유전물질인 메신저리보핵산(mRNA)을 넣은 백신을 개발 중이다. 미국 화이자와 모더나가 개발한 코로나 백신 방식이다.
◇한국 진단 키트, 해외 공급…AI 진단도 개발
치료제는 백신보다 훨씬 다양하게 개발돼 있다. 프랑스 사노피, 스위스 노바티스, 영국 GSK 등이 개발한 치료제들이 FDA 승인을 받아 사용되고 있다. 노바티스는 세계 최초로 신생아·유아용 치료제를 개발했다. ‘코아템 베이비(Coartem Baby)’는 체중 2~5㎏의 신생아와 소아에게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말라리아 치료제로, 9일 스위스에서 정식 승인을 받았다.
진단 기술 역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에스디바이오센서(137310), 휴마시스(205470), 씨젠(096530) 등 진단키트 업체들이 해외에 말라리아 진단 키트를 공급하고 있다.
특히 노을(376930)은 말라리아 진단 인공지능(AI)인 ‘마이랩 MAL’을 개발했다. AI는 현미경 사진을 분석해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된 적혈구를 찾는다. 기존 키트보다 진단 시간을 절반가량 줄였고 정확도도 높였다. 이 기술은 WHO 산하 국제의약품구매기구(UNITAID)의 보고서에 디지털 현미경 기반 말라리아 진단 시스템으로 유일하게 포함됐다.
질병청 관계자는 “기후 변화와 감염병 확산이 맞물리면서 말라리아는 더 이상 일부 지역의 풍토병이 아니다”라며 “모기 개체 수를 줄이는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치료제와 진단 기술, 그리고 한국형 백신 개발을 포함한 과학기술 기반의 종합 대응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