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사 머크와 존슨앤드존슨. /로이터

미국제약협회(PhRMA)가 수출 의약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해 미국에 피해를 주는 국가로 한국을 지목했다. 미 정부에는 현재 진행 중인 무역 협상을 지렛대 삼아 한국이 약값 정책을 개선하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3일 국내 제약 업계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과 함께 “미국산 신약 약값 상승으로 이어질 경우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왔다. 앞서 지난 27일 미국제약협회는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이런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협회는 약가(藥價) 문제가 가장 심각한 국가로 한국과 호주·캐나다·프랑스·독일·이탈리아·일본·스페인·영국·유럽연합(EU)을 지목하고, 약품 소비가 많은 이들 고소득 국가를 미국 정부가 가장 우선해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제약협회가 밝힌 약가 문제는 그동안 한국 시장에 진출한 글로벌 제약사를 중심으로 줄곧 제기됐다. 한국의 의료 제도가 신약 개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엄청난 투자를 해서 어렵게 개발한 신약인데 가격을 지나치게 낮게 책정한다는 말이다. 다만, 미 행정부가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 당국과 협상을 한 적은 없었다.

국내 제약업계는 미국이 무역협상에서 약가를 들고 나오면 보건 당국이 건강보험 재정 부담과 환자의 신약 도입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안 그래도 경고등이 켜진 건강보험 재정이 더 나빠질 수밖에 없고, 한국이 계속 거부하면 미국 제약사들이 신약 출시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일까지 벌어질 수도 있다.

외국계 제약사의 한 임원은 “미국 제약업계가 한국의 약가 책정 방식을 개선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한 것인데, 양국간 대립이 심해지면 자칫 앞으로 국내 신약 도입과 급여화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2025년 4월 2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 만들자(Make America Wealthy Again)’ 무역 발표 행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 행정명령에 서명한 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AFP

◇‘통곡의 벽’이 된 약가 평가 기구

한국은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신약의 품목 허가를 결정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급여 적정성을 평가하고 약가를 정한다.

제약사는 심평원의 ‘건강보험 급여 등재’를 중요한 관문으로 여긴다. 보험 급여가 적용돼야 국내에서 처방이 늘어 의약품 매출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급여 등재와 약가는 정부 관계자와 의학계 전문가들이 기존 약품과 효능을 비교하고, 혁신 가치, 경제성 평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한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한국의 건강보험 재정이 한정적인 만큼 평가 과정에서 신약의 혁신성보다 안정적인 재정 관리를 더 고려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특히 고가의 항암 신약은 급여 등재와 가격 협상 과정이 더 험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에 진출한 글로벌 제약사들이 항암제 급여 등재 필수 관문인 심평원의 암질환심의위원회(암질심)와 약제급여평가위원회(약평위)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를 정도다.

미국 머크(MSD)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는 현재 총 18개 암종, 34개 적응증으로 국내 허가를 받았다. 그중 비소세포폐암, 호지킨림프종, 흑색종, 요로상피암 4개 암종에서 7개 적응증만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한국MSD는 키트루다의 다른 적응증에 대한 보험 급여 등재에 도전했지만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회사는 2023년 심평원에 제출한 키트루다 보험급여 기준 확대 검토 신청서는 1년 반 동안 암질심에 총 다섯 번 올랐으나, 모두 ‘재논의’ 판정을 받았다. 업계에서 재논의 판정은 사실상 기업이 가격을 깎아 제시하지 않으면 급여 확대가 불가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MSD는 올해 다시 키트루다 급여 확대에 도전해, 지난 2월 열린 암질심에서 17개 신청 적응증 가운데 11개의 급여 기준이 마련됐다. 5전 6기에 성공한 셈이다. 다음 관문인 약평위를 거쳐 건보공단과 협상을 통해 최종 급여가 적용될 예정이다.

국내에서 신약 급여화 재수, 삼수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미국 제약사 애브비의 항암제 엡킨리도 지난해 12월 암질심의 벽에 막혔다가 지난달에야 심의를 통과했다. 미국 얀센(J&J)의 다발골수종 치료제 텍베일리는 작년 11월에 이어 지난 6월 암질심도 넘지 못했다.

미국 제약사들은 한국 당국이 정한 약가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의 매출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다른 국가들이 미국 제약사들과 약가 협상을 할 때 한국에서 책정된 가격을 참조해 협상을 진행하다 보니 한국의 가격 방어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조선DB

◇건보 재정, 환자 피해 두고 고민

업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제약업계의 의견을 수용해 실행에 옮길 경우 정부와 보건 당국의 셈법이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결국 돈 문제다. 미국 제약사가 원하는 약가에 맞추려면 건강보험 재정 부담과 함께 의료비 상승으로 국민에게도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 머크의 항암제 키트루다의 1년 건강보험 급여 청구액만 4000억원 이상이다.

그렇다고 보건 당국이 건강보험 재정만 보고 신약 약가를 계속 낮출 수도 없다. 미국 제약사와 협상이 길어지거나 아예 무산되면 환자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획기적인 치료법과 혁신 신약이 나올수록 급여를 보장해 달라는 환자들의 청원과 요구도 커지고 있다.

김국희 심평원 약제관리실장은 “2023년 기준 항암제 약제비 증가율이 26%에 달했다”며 “쏟아져 나오는 고가 신약과 병용 요법을 급여화하는 것을 과연 건보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병용 요법과 더 비싼 항암제가 나올 텐데 급여화를 하면 (건보 재정이) 지속 가능할지 우려가 있다”며 “고가의 항암신약과 관련한 별도의 제도를 마련하는 등 방안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업계도 강 대 강 대립이 벌어질지 우려한다. 협상이 깨지면 미국산 신약의 국내 공급이 막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계 제약사의 한 임원은 “추후 진행되는 무역 협상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자칫 본사가 한국 시장을 뒷순위로 두면서 신약 출시를 미루거나 꺼리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