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식 규제 시스템을 도입하며 바이오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정부는 규제 완화와 심사 단축 등 ‘속도’를 무기로 세계 바이오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미국을 추격하는 수준을 넘어, 제도 혁신을 통해 바이오 패권을 잡겠다는 전략이다.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총국(NMPA)은 주요 신약 임상시험계획(IND)에 대한 심사 기간을 현행 60일 이내에서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동일한 30일로 단축하겠다고 지난 17일 발표했다. 신약 가치가 명확하거나 소아암·희귀질환 치료 목적의 소아용 약물, 다국가 임상시험 등이 단축 대상이다.
◇中 바이오, 미국식 규제 완화로 속도전
시장조사기관 그랜드뷰리서치(Grand View Research)에 따르면 중국 바이오 시장 규모는 2023년 102조원에서 2030년 363조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실제로 중국의 글로벌 제약사 대상 신약 기술 수출 비중은 10년 전 0%에서 지난해 30%로 늘었고, 항암 신약 개발 규모는 이미 미국·유럽을 앞질렀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계는 중국의 임상시험 규제 완화 조치가 글로벌 대형 제약사(빅파마)와의 투자나 기술 거래에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스콧 고틀립(Scott Gottlieb) 전 FDA 국장은 “미국 기업이 임상 1상 시험 승인을 받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반면, 중국은 임상시험 개시가 비교적 간단해 중국 바이오 기업이 미국보다 유망 후보물질을 더 빠르게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도 이달 초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미국을 가장 먼저 추월할 가능성이 높은 5대 핵심기술 중 하나가 바이오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정부는 신약 개발에서 국제 기준을 받아들인 건 10년도 안 됐다. 2015년이 돼서 다국가 임상시험을 허용했고,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ICH)에 2017년 가입했다. 임상시험계획 심사도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리다가 2018년에 60일로 크게 단축됐다. 이번에 중요 신약 관련 심사는 30일까지 줄인 것이다.
이 같은 정책 변화는 성과로 이어졌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딜포마(DealForma)에 따르면, 빅파마가 5000만달러(한화 690억원) 이상 규모로 도입한 기술 가운데 약 29%가 중국 바이오 기업이 개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에는 이 수치가 3%에 불과했다.
중국 바이오 기업이 특히 강점을 보이는 분야는 항암제다. 지난해 기준 중국의 기술 거래 가운데 항암제 비중은 54%에 달한다. 전 세계 항암제 임상시험 중 중국이 진행 중인 비율은 2009년 2%에서 지난해 39%로 급증해 이미 미국(32%)과 유럽(20%)을 제쳤다. 한국은 1%에 그쳤다.
◇국제 무대서 존재감 키우는 中, 다급해진 美
국제 무대에서도 중국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미국 보스턴에서 열리는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바이오USA)에 참석한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이제 글로벌 밸류체인(의약품 개발부터 생산·공급까지 전 과정)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정치와 산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미국도 중국 바이오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여전히 중국 바이오 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하는 생물보안법을 추진하면서도, 속도 경쟁에 맞서며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이 임상시험계획 심사 단축을 발표한 지 하루 지난 18일, FDA는 ‘국가우선바우처(CNPV)’ 제도 카드를 꺼냈다. 미국에 생산시설을 갖췄거나,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기업에는 최종 신약허가신청(NDA) 심사 기간을 기존 10~12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하는 게 골자다. FDA 내부 전문가들이 하루 동안 집중 회의를 통해 판단을 내리는 방식으로, 제약사에게는 강력한 인센티브이다.
기업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심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FDA는 적절한 치료제가 없는 중증 질병에 대해 이미 우선·신속 검토 제도(Fast-track·패스트트랙)를 시행하고 있다. 패스트트랙 약물로 지정되면 허가 심사 기간은 기존 1년에서 6개월 이내로 단축된다.
미국 의학전문지인 스탯(STAT)에 따르면, 현재까지 패스트트랙 약물 중 허가 심사 기간이 3개월 이내로 걸렸던 건 미국 버텍스 파마슈티컬스의 낭포성 섬유증 치료제 ‘트리카프타’가 유일하다. 높은 효능에 개발 초기부터 혁신 신약으로 주목받으며 2개월 반이 걸렸다. 미국 길리어드가 개발한 최초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인 ‘베클루리주(렘데시비르)’도 승인까지는 3개월 넘게 걸렸다.
홀리 페르난데스 린치(Holly Fernandez Lynch)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법대 교수는 스탯에 “FDA는 패스트트랙 제도를 통해 이미 기존 심사 기간을 절반이나 줄였다”며 “여기서 또 1~2개월로 줄인다는 것은, FDA 담당자들이 일부 검증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