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5일 서울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료계와 한의계가 의료기기 사용을 놓고 정면 충돌하고 있다. 한의사들은 의사들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초음파, 뇌파계에 이어 엑스레이까지 사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의사들은 과잉 진료, 오진(誤診) 가능성이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의료계는 이런 상황에서 한의계를 향해 공개 토론회를 제안했다. 한의계는 여야 대선 후보까지 불러 토론회를 진행하자고 맞불을 놨다. 의사와 한의사들은 표면적으로는 환자 치료의 효율성과 안전성을 두고 다투고 있지만 내면에는 의료 시장을 두고 벌이는 경쟁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의사가 영역 침탈” vs “대선 후보 불러 토론”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는 12일 대한의사협회(의협)를 향해 양당 대선 후보와 함께 끝장 토론을 하자는 입장문을 냈다. 앞서 의협이 지난 8일 한의사들이 엑스레이를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며 공개 토론을 제안하자 맞수를 둔 것이다.

당시 의협은 “한의계가 영역을 침탈하고 있다”면서 “(의료기기를) 사용하고 싶으면 의사 면허를 따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의협은 “한의사가 초음파, 뇌파계, 엑스레이 같은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사법부의 준엄한 판결이 있었다”면서 “행정 절차는 한의계와 정부 부처가 협의할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의협은 또 한방 난임 치료가 과학적인 효과가 있는지 따지자고 했다. 한의협은 “한방 난임 치료는 효과가 입증돼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의료계는 의대 증원 불발로 인한 의사 부족과 진료 공백 문제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면서 “여야 대통령 후보와 함께 지역 의료 붕괴 같은 현안을 논의하자”고 했다.

지난 2월 2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대한한의사협회 윤성찬 회장이 한의사의 엑스레이 사용 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한의사의 CT, MRI 사용 관련 판결은 없어

의사와 한의사 갈등은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사들은 한의사들이 초음파 기기를 쓴다며 복지부에 단속을 요구했다. 2000년대에는 한의사들이 CT(컴퓨터단층촬영장치), MRI(자기공명영상장치)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의료법상 의료인은 면허 범위 밖에서 진료 행위를 할 수 없는데 한의사들이 의료기기를 사용해 면허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은 2013년 12월 열렸다. 헌법재판소는 한의사도 안압 측정기, 청력 검사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022년 12월 한의사가 초음파 진단기로 환자를 진료해도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초음파를 진단 ‘보조’ 기기로 사용하고 보건 위생상 위해(危害)를 가할 우려가 없다면 괜찮다는 것이다.

한의사 손을 들어주는 판결은 연달아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이듬해인 2023년 8월 한의사도 뇌파계로 파킨슨병과 치매를 진단할 수 있다고 했다. 뇌파계는 뇌 신경 사이에 발생하는 신호를 파동으로 나타내는 의료기기다. 수원지법 형사4부(재판장 이정엽)는 지난 1월 엑스선 골밀도 측정기를 사용한 혐의(의료법 위반)를 받는 한의사에게 항소심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상고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됐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기 때문에 법원 판단을 따르는 편”이라면서 “CT, MRI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엑스레이는 방사선을 방출하는 의료기기라 안전 문제를 따져야 한다”고 했다. 의료법상 방사선 의료기기를 사용하려면 안전 관리 책임자를 둬야 하는데 한의사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그래픽=손민균

◇환자 편의 VS 오진 우려…“건보 재정 문제도”

한의사들은 국내 의료기기 4000여 종 가운데 법원 판결이 나온 것은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의료기기 도움을 받아 환자를 보다 정확하게 진단하겠다는 것이다. 한의협 관계자는 “(의료기기를 사용하면) 객관적인 진단 자료가 생기기 때문에 환자를 효율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의사들은 그러나 오진 가능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따로 있을 정도로 엑스레이 같은 의료 영상을 판독하려면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상 결과를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면 환자를 잘못 치료할 수 있다고 의사들은 설명한다.

의료비 부담 논란도 있다. 의협 관계자는 “한의사들이 의료기기를 사용하면 그만큼 건강보험 재정이 한의사들에게 투입되는 것”이라면서 “건강보험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 피해가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업계는 의사와 한의사 갈등이 결국 밥그릇 싸움이라고 보고 있다. 의료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며 환자를 붙잡기 위한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앞서 일부 한의사들은 경기가 어려워지자 교통사고 환자에게 눈길을 돌렸고 이들을 붙잡기 위한 물리 치료실을 만들며 정형외과와 경쟁하기도 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의원은 1996곳이 개업했고 1028곳이 폐업했다. 한의원은 699곳이 개업했고 555곳이 문을 닫았다. 의료 시장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의정 갈등으로 진료 공백이 발생했는데 의료계와 한의계 영역 충돌마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