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렬 국무조정실장(왼쪽)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회의 시작 전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통상당국이 한미 관세협상에서 농축산물에 대한 비관세 장벽 해소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이와 관련해 농정당국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먹거리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민감성과 농축산업을 생업으로 하는 농가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고 통상 협상을 밀어붙일 경우 200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사회 문제가 됐던 ‘광우병 파동’ 같은 일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17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대한 취재를 종합하면 통상당국은 향후 진행될 대미 통상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을 주요한 협상 카드로 검토하고 있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4일 브리핑에서 “농산물도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라면서 “협상 전체 틀에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 본부장은 “모든 협상에서 농산물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적이 없다”라면서 “(그 과정에서) 산업 경쟁력은 강화됐다. 유연하게 볼 부분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쇠고기와 과일, 쌀 등 미국산 농축산물에 대한 시장 개방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통상당국은 농축산물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와 구체적인 협의를 하지 않은 상황이다. 농식품부 한 국장급 관계자는 여 본부장의 브리핑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농축산물 시장 개방 카드를 언급했다”면서 “내부 총질”이라고 꼬집었다.

농식품부는 통상당국과 품목별 시장 개방 영향을 협의하고 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공식 해명자료를 통해 “품목별로 시장 개방의 영향을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있다는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른 농식품부 관계자는 “품목별 개방과 관련해 어떤 협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라면서 “과일의 경우 동식물위생검역(SPS) 절차에 따라 수입 여부가 결정돼야 하는데, 이런 일련의 절차에 대한 통상당국의 협조·지원 요청을 받은 게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농축산물 시장 개방에 따른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농축업 기반을 훼손하지 않을 방법이나 농가에 대한 피해 보전 대책 등이 검토돼야 하지만, 이런 절차 없이 관세 협상의 카드로서의 유효성만 검토되고 있는 셈이다.

경기 광주시 한 냉동창고에서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검역관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검역하고 있다. /조선DB

농가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는 지난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한-미 상호관세 협상 농축산물 관세·비관세 장벽 철폐 반대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이들은 “통상 당국이 상호관세 조정 협상 카드로 농축산물 관세·비관세 장벽 완화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농촌 현장의 불안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관세·비관세 장벽이 추가 해소될 경우 사실상 완전 (시장) 개방에 가까워 국내 농업생산기반의 붕괴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부 전문가 사이에선 미국산 쇠고기와 사과 수입 확대 카드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관세율을 얼마나 낮춰줄지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556억달러를 상회한다. 미국산 쇠고기의 한국 수입액 규모는 22억달러 내외다. 미국에서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도축 규모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정도다.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를 수입해도 무역수지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

사과 역시 전체 한·미 교역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사과 시장 규모는 8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이 중 10%를 미국산 사과가 대체한다고 가정하면 미국의 대한(對韓) 수출 증대 효과는 800억원(미화 6000만달러) 규모에 그칠 뿐이다.

서진교 GS&J인스티튜트 원장은 “통상당국에서 농산물 수입 확대를 협상 핵심 카드로 보는 듯 한데, 미국에선 실제적으로 관심이 큰 분야는 아니라고 본다”라면서 “무역수지 균형에 미치는 영향도 크지 않은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진짜 관심은 자동차와 철강 등 미국 내 제조업 부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농축산물 시장 개방 확대 카드로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대거 낮추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서 원장은 이어 “농축산물에 대한 비관세 장벽 해소로 미국이 가져가는 실익은 크지 않지만, 국내 농축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다”라면서 “관세 협상에서 농축산물 카드를 만지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농축산물 외에도 다양한 옵션을 검토해서 관세 협상에 임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