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시각) 반도체와 의약품에 대한 품목별 관세를 예고하면서 대미 수출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품목별 관세’ 부과 이후 자동차와 철강 등 기존 대미 주력 수출 품목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최근 대미 수출이 부쩍 늘고 있는 반도체와 바이오 분야의 수출이 위축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인공지능(AI) 개발에 필수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수요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조치가 미·중 첨단산업 기술패권 경쟁 속 미국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켜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 올 상반기, 반도체·바이오 對美 수출 두자릿수 이상 성장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주재한 내각회의에서 취재진에 “우리는 의약품, 반도체, 몇몇 다른 것들(에 대한 관세)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에 대한 관세율이나 발표·부과 시기 등 구체적 사항은 언급하지 않았다.
의약품과 관련해선 “우리는 사람들에게 (미국으로) 들어올 시간을 1년이나 1년 반 정도 줄 것”이라며 “이후에는 그들이 의약품이나 다른 것을 가져오면 관세를 부과할 것. 매우 높은 관세율, 200% 정도”라고 말했다. 제약회사들이 미국으로 다시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데 1년에서 1년반 정도의 시간을 주고, 이후부터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언급한 반도체와 의약품(바이오)은 최근 한국의 주력 대미 수출품으로 떠오른 품목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올 상반기 대미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3.7% 감소하는 상황에서 반도체와 바이오 품목 대미 수출은 두자릿수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통상 위기 속에서 대미 수출 실적 선방을 견인한 쌍두마차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9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대미 반도체 수출액은 49억7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4.7% 증가했다. 미국 내 인공지능(AI) 개발 수요를 바탕으로 고성능 한국산 반도체 수요가 증가한 게 대미 반도체 수출 증가로 이어졌다. 대미 바이오 수출액은 16억6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4.7% 증가했다. 바이오시밀러 및 위탁생산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출 실적이 크게 늘었다.
산업계에선 미국이 반도체와 의약품에 대한 관세 조치를 취할 경우, 상승 국면을 타던 두 품목의 수출이 품목별 관세 직격탄을 맞은 자동차와 철강처럼 정체기를 맞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올 상반기 대미 자동차 수출액은 153억4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6.8% 감소했다. 미국 내 자동차 생산량 증가와 함께 품목별 관세 조치로 한국산 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된 게 주된 요인으로 거론된다. 상반기 대미 철강 수출액은 19억4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1.2% 감소했다. “미국의 고관세 정책과 시장 불확실성 여파가 컸다”는 게 산업부의 분석이다.
◇ “반도체, 車와 달라“… ‘美, 스스로 족쇄 채운다' 평가도
자동차와 철강 수출을 위축시킨 것처럼, 반도체와 바이오에 대한 관세 부과가 한국산 반도체의 수출 위축으로 이어지게 될까. 이에 대해 정부 내부에선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장 미국 내에서 반도체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면서 “중장기적으로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유인할 수 있을진 몰라도, 기술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고성능의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수요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도 “대체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B2C 상품인 자동차와 C2C 상품인 반도체는 상황이 다르다”라면서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스펙이 있고, 가격 요인 보다는 기술력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경향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주력 생산국인 대만 역시 품목별 관세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반도체 기업에만 불리한 요건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조치가 미국 첨단 산업의 기술 투자 수요를 위축시키고, 기술 우위를 약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초지능 AI 개발을 위해 고성능 반도체가 필요한 미국 빅테크 기업의 투자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되고, 이는 AI 기술 굴기를 꿈꾸는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중장기적으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유치하고, 동맹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라면서도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는 미국 내 빅테크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자국의 기술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조치가 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바이오·의약품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시행 시기를 ‘1년~1년반’ 정도로 유예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은 아니라는 안도가 나오고 있다.
현재 바이오 기업들은 각사 별로 미국내 위탁생산(CMO) 계약 체결 등 자구책 마련에 돌입한 상태다. 미국 내 생산시설을 보유한 회사를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기업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허혜민 키움증권 연구원은 “연초부터 의약품 관세에 대해 언급이 있었고, 미국으로 수출하는 기업들은 미리 재고 확보와 CMO 계약 추진 등 대비를 해 왔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영향은 크진 않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다만 장기적 관점에서 악재는 분명하다. 미국은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이며, 국내 제약기업의 최대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구체적인 관세율로 제시한 ‘200%’라는 수치는 현실성이 없는 관세율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허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발언에서 언급한 관세율 ’200%‘는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라며 “고관세가 미칠 파장에 대해 한번 더 리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재국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부회장은 “200% 관세율은 상식적이지 않은 숫자로, 사실상 미국 시장을 포기하라는 의미”라면서 “환자 단체의 반발 등을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관철하기 어려운 관세율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기업이 미국에 생산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1년여를 유예한다고 했는데, 고도의 정밀생산시설인 바이오 공장을 1년~1년 반만에 완공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자국우선주의에 따라 해외의 핵심 생산시설을 자국으로 이전시키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현실화 가능성은 의문”이라며 “계속 상황을 모니터링 하면서 민관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 이슈”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