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산업통상자원 R&D 전략기획단장(전 삼성전자 사장)이 지난 6월 20일 서울 서초구 한국기술센터에서 국내 과학기술산업의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취임 후 한 연구소를 가보니 삼성에서 3~4년 전 했던 걸 시연하더라. ‘왜 이걸 하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통상자원 R&D 전략기획단장을 맡은 김현석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 20일 진행한 인터뷰에서 취임 후 국내 주요 연구소를 돌며 마주한 황당한 경험을 꺼냈다.

연구소들이 비슷한 주제, 유사한 내용의 R&D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연구 과제 중엔 이미 기업에서 추진해 마무리한 과제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걸 누군가 정리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각각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나누고, 업무 분장을 잘 해야 한다. 기업과 손발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김 단장은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연구소들이 거액 연봉을 주며 인재를 유치하는 상황에서 국내 R&D 기술인력의 기초 역량을 키우고, 팀워크를 다지는 것이 본인에게 부여된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여러 곳에 나눠주기 위해 R&D 과제를 미세하게 쪼개는 것도 바꿔야 한다”라면서 “한 명이 소규모 프로젝트를 여러 개 하는 구조가 아니라, 몇백억, 몇천억짜리 과제에 연구원이 여럿 붙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AI 역량에 대해선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고 평가한 그는 AI 개발 우선 과제로 공공형 LLM 보단,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산업별 특화 AI’(도메인 스페시픽 제너레이티브 AI) 개발을 꼽았다. 그는 “지금 논의되는 소버린 AI가 공공재로서 의미가 있을 순 있지만, 산업 전체를 이끄는 전략이 되긴 어렵다”라며 “범용 모델 말고, 각 산업에 맞는 실용적인 AI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라고 했다.

김 단장은 “지금 아무것도 안 하면 진짜 비참해질 수 있다”라면서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뜨렸다. 정신 차리고 눈을 떠보니 ‘패스트 팔로우(빠른 추격)’조차 어려운 상황이 됐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김현석 산업통상자원 R&D 전략기획단장(전 삼성전자 사장)이 지난 6월 20일 서울 서초구 한국기술센터에서 국내 과학기술산업의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규제 이야기를 해보자.

“이재명 대통령도 규제를 대대적으로 풀겠다고 했는데, 지금 당장 손 봐야 할 건 데이터 규제다. 우리나라, 데이터 활용하기 정말 어려운 나라다. 정부가 갖고 있는 데이터가 엄청 많은데, 그걸 오픈을 안 한다. 개발자 입장에선 정말 중요한 게 데이터다.”

―규제 개혁의 첫걸음은 데이터 개방이 돼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게 데이터다. 그런데 특정인의 생각을 알아선 안 된다는 이유로 데이터를 막아두고 있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고, 깔끔하게 기준을 정해서 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의료의 경우 우리는 환자 기록을 전혀 못 본다. 외국은 수준 차이는 있지만, 우리보다는 훨씬 활용이 자유롭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일단 막자’는 논리에서 규제는 출발한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다.”

―우리의 인력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국내에 좋은 인재가 별로 없다. 반도체 인재 해외로 많이 빠진다는 기사도 많고, 소프트웨어 쪽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막느냐인데, 현실적인 대책이 없다. 미국에선 AI 인력이 100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우리 돈으로 13억이 넘는데,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나.

지금 일부 기업은 미국에 R&D 센터를 세워서 거기 연봉을 맞춰주고 있다. 하지만 그 기술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 기업이 활용은 하겠지만, 인력은 다 외국에서 자라고 있다.”

―인재 격차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사전에 받은 서면 질문 중에 재밌는 비유가 있었다. ‘삼성전자 사장 하다가 R&D 단장 맡은 건, 레알마드리드 감독하다가 국가대표 감독 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인재 육성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게 히딩크였다.

2002년 당시 우리 대표팀 개개인 역량은 세계 수준에 못 미쳤지만, 히딩크는 체력 키우고 팀워크 만들고 멀티플레이어로 전환시켰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 연구소 많고, 인원도 많다. 그 인력들의 체력을 키우고, 하나로 묶는 방식이 필요하다.”

―부족한 인재 문제를 팀워크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지금처럼 전략 없이 R&D를 하면, A 연구소와 B 연구소가 똑같은 과제를 하게 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취임 후 한 연구소를 가보니 삼성에서 3~4년 전 했던 걸 시연하더라. ‘왜 이걸 하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누군가 정리해야 한다. 각각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나누고, 업무 분장을 잘 해야 한다. 기업과 손발을 맞춰야 한다.

과거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해 ‘체력 좋고, 정신력 좋다’고 생각했지만, 히딩크의 진단은 ‘체력이 약하다’였다. 우리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실제 결과물로 이어지고 있나 보면, 그렇지 않다. 정말 잘했다면 상품이나 서비스로 나오든지, 아니면 논문으로라도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기업과 정부의 협업이 중요하겠다.

“기업과 정부의 R&D에 대한 생각이 같아져야 한다. 학술적 성과와 산업적 성과 모두 중요하다. 여러 곳에 나눠주기 위해 R&D 과제를 미세하게 쪼개는 것도 바꿔야 한다. 한 명이 소규모 프로젝트를 여러 개 하는 구조가 아니라, 몇백억, 몇천억짜리 과제에 연구원이 여럿 붙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형태로 진화해야 한다.”

―한국의 AI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이제 걸음마 떼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따져보면, 결국 초반에 얘기한 ‘혁신이 사라진 십수 년’과 연결된다. 지금 ‘AI 3대 강국’이 목표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지금 세계 수준이 1등인 미국과 2등인 중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하다. 이 상황에서 3등은 의미가 없다. 4등이나 5등이나 똑같다.”

―국가 주도 AI 개발 방향은 어떻게 보나.

“AI 수석도 생겼고, 곧 관련 정책도 나올 거로 본다. 지금 논의되는 소버린 AI(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개발한 LLM 기반 AI)는 공공재로서의 의미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산업 전체를 이끄는 전략이 되긴 어렵다. 그보다 우리가 우선해야 할 건, 산업별 특화 AI, 즉 도메인 스페시픽 제너레이티브 AI 개발이다. 범용 모델 말고, 각 산업에 맞는 실용적인 AI를 만들고, 구체적인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속도와 관련해선 국가 예산 프로세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어떤 산업에 투자하자고 제안이 들어와도 예산에 반영되려면 2년 반이 걸린다. 올해 예산은 작년에 짠 거고, 작년 예산은 재작년에 수요를 발굴해서 만든 거다. 이런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면 산업이 이미 바뀌고 난 다음에 예산이 따라가게 된다.”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

“기업을 보면 된다. 기업은 먼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나중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정부는 심의부터 하고, 결정은 훨씬 뒤에 한다. 이걸 ‘선 집행, 후 책임’ 체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정하고 집행하는 속도가 경쟁력인 시대다. 정부의 움직임도 여기에 맞춰야 한다.”

―어떤 업무에 우선 집중하려고 하나.

“일단 국내 연구소들을 전부 돌아볼 생각이다. 각 연구소의 강점을 파악하고 R&D 업무 분장을 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보려 한다. 기업도 많이 만나서 무엇이 필요한지 수요를 파악하고, 그걸 연구기관과 매칭하는 업무도 하려고 한다. 나는 ‘중개인’이다. 양쪽이 잘 협력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5년 뒤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지금 아무것도 안 하면 진짜 비참해질 수 있다. 과거에 내가 쓴 보고서에는 2034년에 성장률이 1.5%로 떨어진다고 했는데, 올해 벌써 1% 아래로 내려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실정이다.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뜨렸다. 정신 차리고 눈을 떠보니 ‘패스트팔로우’조차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래도 우리에겐 위기감이 생기면 뭉치는 힘이 있다. 그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한다. 인재 양성 측면에선 똑똑한 친구들이 다시 공대로 가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벼락부자’가 나오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창업을 통해 부자가 되는 사례가 늘어나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