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국민연금이 한국은행과 실시한 전략적 환헤지를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국민연금이 매도 포지션을 정리하는 과정에 환율이 다시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전술적 환헤지까지 포함하면 수백억달러 규모의 매도 포지션이 남아 있어 외환시장에 미칠 영향이 클 수 있다는 점에서다.
환헤지란 환율 변동의 위험을 없애는 거래를 말한다. 국민연금은 환율이 자체적으로 정해 놓은 기준을 넘어서면 선물환 매도(미래 일정 시점에 사전에 정한 환율로 달러를 팔기로 계약하는 것)를 통해 자산가치를 방어해 왔다. 급등하던 환율이 하락세로 돌아설 경우 원화로 표시한 외화자산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어서다.
◇ 환율 100원 넘게 ‘뚝’… 전략적 환헤지 요건 해제
24일 외환시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 지침에 따라 달러 매도를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연금은 환율이 과거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 일정기간 유지되면 전략적 환헤지를 실시해 왔는데, 최근 들어 환율이 급락하면서 기준선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환헤지 비용 증가 등의 문제로 2018년부터 해외자산에 대한 전략적 환헤지를 하지 않다가, 원·달러 환율이 급등한 2022년 12월부터 해외 자산의 최대 10%에 대해 한시적으로 전략적 환헤지를 재개했다.
비상계엄 사태로 환율이 1450원을 돌파한 올해 초에도 국민연금은 전략적 환헤지를 실시했다. 하지만 탄핵 이후 원·달러 환율이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면서 1400원대였던 환율이 1300원대 중반까지 내려오자 환헤지 요건이 빠르게 해제됐다.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 종료 결정도 이런 흐름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외화자산 관리를 위한 조치지만 시장에는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올해 3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자산이 4872억달러이며, 이 중 최대 10%까지 환헤지가 가능하다. 단순 계산 시 487억달러에 달하는 규모다. 작년 기준 외국환은행의 일평균 달러 거래규모가 195억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물량이다.
업계에서는 국민연금이 그간 150억달러 규모의 전략적 환헤지를 실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략적 환헤지와 별개로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가 재량권을 갖는 전술적 환헤지(외화자산의 최대 5%) 물량까지 합치면 매도 포지션은 더 늘어난다. 올해 3월 기준 국민연금의 전술적 환헤지 규모는 150억달러다. 이를 포함한 국민연금의 매도 포지션은 300억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 매도 포지션 정리 관건…환율 상승 압박 커질수도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전략적 환헤지를 중단하면서 환율 상승 압박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전략적 환헤지가 종료되면 국민연금이 시중에서 달러를 사들여 매도 포지션을 정리할 수 있어서다. 이는 시중 달러 공급을 줄이고 달러 수요를 늘려 원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
지난 1월 2일 윤경수 한은 국제국장이 “곧 국민연금에서 환헤지 물량이 나올 것”이라고 언급하자 달러 공급 증가 기대감으로 당시 1472원을 넘겼던 환율 주간거래 종가가 1466원대로 떨어진 바 있다. 환헤지 종료는 환율을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민연금이 매도 포지션을 줄이더라도 환율 변동성이 커지지 않을 수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국민연금은 2015년말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해외투자 전체 자산의 환헤지 비율을 0%로 변경하는 방안을 의결한 후, 2년 뒤인 2017년 말 이 비율을 50%로 낮췄고 2018년에 0%로 최종 변경했다. 실제 환헤지를 종료하기까지 3년이 걸린 셈이다.
달러를 적극적으로 사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로는 미국의 견제가 있다. 미국 재무부는 최근 공개한 환율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이 보유한 해외 자산 총액이 지난해 4개 분기 동안 약 460억달러 증가해 4700억달러를 기록했다”면서 향후 연기금을 활용한 교역 상대국의 환율 평가절하 가능성 등을 들여다보겠다고 언급했다. 재무부가 주시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선뜻 달러 매수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다시 한번 원화가 약세가 돼서 환율이 1450원까지 오른다면 전략적 환헤지 종료가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원화 강세 심리가 지배적인 상황이라 환율이 급격히 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시적으로 달러 수요가 증가하더라도 전체 시장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요인은 아닐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