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간 삼성전자 반도체의 미래 성장 동력이나 다름없는 핵심 인재들, 그중에서도 ‘브레인’으로 활약했던 박사급 인재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자 삼성전자 내에서도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소수정예 인력들이 전체 프로젝트를 주도해야 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의 인력 유출이 늘어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최근 만난 세계 최대 반도체설계자동화(EDA) 기업 시놉시스의 엔지니어도 그중 하나다.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컴퓨터공학 박사를 받고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삼성전자행을 택했다. 그러나 5년도 안돼 삼성 반도체를 뛰쳐나왔다.
그는 “외부 시각과 달리 삼성 반도체에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젊은 엔지니어들이 많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든 조직 문화와 R&D(연구개발) 조직과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경영진이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재무중심적 관료주의가 너무 확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창의성을 발휘하기가 힘들다”며 “정예 엔지니어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난다는 건 정말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20년 넘게 재직한 한 퇴직 임원도 역시 “삼성전자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에 대해 많은 비판과 저평가가 만연해 있지만 엔지니어링 인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라며 “문제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영진에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 퇴사하거나 퇴사 이후 스타트업을 설립한 엔지니어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연구개발 조직이 과거에 비해 힘을 잃고, 회사 차원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사례들이 삼성전자의 실책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의 한 수석은 “삼성전자 파운드리, 시스템LSI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3나노 GAA(게이트올어라운드) 실패처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정을 경영진이 무리하기 강행했기 때문”이라며 “일부 경영진의 과도한 성과주의와 엔지니어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시장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메모리 사업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023년 10나노 4세대(1a) DDR5 D램의 경우 설계에 문제가 있다는 R&D 조직의 우려를 무시하고 양산을 강행한 경영진의 판단이 화근이 됐다. 당시 삼성전자의 1a 공정 DDR5 D램은 인텔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으며 공급이 미뤄졌고, 이 때부터 SK하이닉스가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한 분기점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설계 문제는 1a 공정에 기반을 두고 한 세대 진화한 10나노 5세대(1b) D램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해당 D램을 기반으로 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업의 실패로 이어졌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엔지니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1a 공정의 결함을 인지했던 2023년 과감하게 재설계를 단행했다면, 메모리 사업이 이처럼 고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푸념도 나온다. 전영현 부회장이 구원투수로 DS(반도체)부문장을 맡은 뒤 뒤늦게 R&D 조직과 경영진의 연계가 일부 정상화됐으며 1a D램 재설계를 결정했지만, 결과적으로 뒤늦은 수습이 됐다. 그 사이 많은 브레인들이 회사를 떠난 상태다.
기술 개발 최전선에서 활약해야 할 엔지니어의 유출은 중장기적으로 회사의 실적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아직 갈 길이 먼 시스템LSI, 파운드리의 경우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이 귀하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전쟁이 현재 진행형인 가운데 삼성전자가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서 향후 10~20년 이상 생존하기 위해서는 재무중심적 경영과 관료주의적 조직 구조를 탈피하고 젊고 실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회사로 탈바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