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칼럼
[김지수 칼럼] 질문하는 인간
[김지수 칼럼] 질문하는 인간
기자를 질문을 위임받은 자라 한다. 내가 질문하는 인간이 된 건 소심한 성정 때문이다. 묻는 것은 직업이기 전에, 낯선 세계를 견디는 태도였다. 묻고 듣는 동안은, 들인 노력에 비해 과하게 존재감이 유지되고 정보가 입력되며 관계가 호전됐다. 그래서 계속 물었다. 때로는 궁금해서 때로는 불안해서. 지하철 역사 안에서 행인을 붙잡고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를
2020.12.23(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나는 왜 트로트에 빠져들었나
나훈아 공연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허리 굽은 할머니도 번쩍 일으켜 세운다는 후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흰 러닝에 청바지를 갈아입고 나와 세트마다 무대를 찢어버리는 이 칠십 대 트로트 가수에겐 육적인 끼와 조르바 풍의 자유로움이 흘러넘쳤다. 눈은 애닯게 흘기면서 입은 찢어지도록 웃는 ‘폼’이 기름진 보디빌더처럼 관능적인데, 기타 하나로 단출하게 ‘옥경이’와
2020.12.23(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예의 없는 자의 파국과 예의 있는 자의 천국’ 동시에 보여준 봉준호
현재 지구상에서 봉준호만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변방과 중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아우성’을 사려 깊게 표현해내는 감독은 드물다. 어떤 상황에서건 우직한 몸으로, 우왕좌왕하는 인파를 뚫고, 우아하게 착지하는 그의 여유와 위트가 놀라울 뿐. 11년 전 영화 ‘마더' 촬영 후 처음 만났을 때 봉준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김혜자는 위대한 배우이고,
2020.12.23(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혐오 시대를 건너는 법
주말 사이 ‘개근 거지'라는 뉴스가 화제가 됐던 모양이다. ‘쯧쯧. 해외 여행을 못 갔으니, 결석 한 번 못 해보지!’ 개근하면 성실의 인장이 아닌 가난의 낙인이 찍힌다는 이야기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꽃이 피나 개근했던 나는, 기가 막혔다. 수학여행조차 담임 선생님 쌈짓돈으로 갔던 나는 그럼 ‘원조 OO’였던가. 그날 저녁, 우리 집 초등생 딸아이에
2020.12.23(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괜찮아, 부탁... 부탁해야 인생이 바뀐다
콘텐츠 혁신을 이끈 디즈니의 전 회장 로버트 아이거는 자신의 경력이 외삼촌의 작은 부탁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그의 외삼촌이 맨하튼의 한 병원 입원실에서 만난 ABC 방송국의 하급 임원에게 ‘조카가 TV 방송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부탁한 것이다. 아이거는 이후 간단한 면접 채용 절차를 거쳐 촬영장의 잡무를 처리하는 ABC의 최말단 심
2020.12.16(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어린 아이의 말을 들으라
한창 ‘아이의 말'에 관심이 가던 차에 김소영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었다. 독서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을 관찰해서 한 명 한 명을 정확하게 그린 책이다. 책 속의 아이들은 웃기고 다정하고 애틋하고 사려 깊다. ‘내가 어렸을 때는 종이접기를 잘 못했다'거나 ‘엄마가 딸기잼 뚜껑 못 열 때 내가 해줬다’거나..., 옛날을 회상하고 현재를 자랑스러워하는
2020.11.19(목)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롤모델 없음... 청년이 온다, 청년의 언어가 온다
한동안 어른의 말, 전문가의 말에 귀가 솔깃하더니 요즘엔 청년의 말에 귀가 기울어지고 있다. 인터뷰어로서 경청이 일이라, 청력은 좀 떨어져도 귀의 방향은 신뢰하는 편이다. 귀는 세상의 민심과 함께 마음의 방향을 따른다. 마음이 없으면 들려도 못 듣고, 마음이 향하면 안 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청년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건 배우 박정민을 인터뷰했을 때부
2020.10.28(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환불’ 말고 환대... 나이스하게 ‘나잇값’ 하는 언니들 세상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라는 희대의 언니들을 모아 프로젝트 그룹 ‘환불원정대'를 꾸린 제작자 지미유(유재석 분, MBC ‘놀면 뭐하니')가 송은이를 만났던 장면이 선명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예능인 송은이가 아닌 CEO 송은이(유튜브 콘텐츠 제작사 ‘비보’와 매니지먼트사 ‘시소’의 대표)의 기세는 예사롭지 않았다. "이분들 ‘환불원정대'로 어렵게 모셨다
2020.09.30(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정해진 미래와 연대하는 법 ‘테넷’
20~30대, 기운이 넘쳐 마냥 달리던 시절엔, 가진 게 시간밖에 없어 밤마다 거리를 쏘다니며 뭉텅뭉텅 시간을 흘려보냈다. 새해가 되면 잠깐 ‘미래의 기억력’이 살아난 채무자처럼 가슴 졸이다, ‘작심삼일'의 밑천을 드러내곤 했다. 중년에 이르고보니, 물리적 시간은 방아쇠를 당긴 총알처럼 무서운 직진력으로 나아가지만, 내 머릿속의 시간은 돌려 감은 비디오테이
2020.09.10(목)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부캐’의 나날들... 나를 지키며 일하려면 올인하지 말라
MBC 주말 예능 ‘놀면 뭐하니'를 즐겨 본다. 유재석은 ‘위대한 코치' 김태호PD의 추임새를 거절하지 않는 것을 통해 자기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즐길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을 주고 싶다"는 김태호의 자극에 드러머, 요리사, 가수 등으로 N차 세포분열하며, 신나게 자기를 갈아 넣는 것이다.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확장하는 포맷은 ‘놀면 뭐 하니
2020.08.13(목)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죄와 벌
인구 천만의 대도시 서울. 펄럭이는 태극기와 출렁이는 촛불로 ‘광장 정치’의 문을 활짝 열었던 3선 시장이 고인(故人)이 됐다. 고인(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업적을 치하하고 애도하는 자, 고인의 죄와 벌을 심판하는 자로 여론 광장은 홍해처럼 갈라졌다. 누군가는 한 세대가 죽어야 성추행의 악습과 악취가 사라질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무소불위의 고위 공직자 권
2020.07.16(목)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실례지만, 정리하고 사세요?
얼마 전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쓴 특수청소부 김완을 인터뷰했다. 김완은 고독사, 범죄 현장 등 여러 이유로 생명이 떠난 ‘죽은 집’과 저장강박증으로 오물이 쌓인 ‘쓰레기 집’을 청소하는 일을 했다. 코를 찌르는 죽음의 냄새와 카오스가 돼버린 쓰레기집을 무릎 꿇고 앉아 찬찬히 정리하는 그 일을, 그는 ‘언두잉(undoing)' 혹은 ‘컨트롤 제트(
2020.06.25(목)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남긴 것... 불운은 있어도 악인은 없는 세상
뒤늦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몰아 보며 브라운관 앞에서 주책없이 눈물을 쏟았다. 아!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가면, 슬픔과 비참을 겨루는 병원도 ‘쓸만한 천국’이 되는구나. 임의로 파헤쳐지는 육체의 정거장에서, 누군가에겐 청천벽력같을 뇌사 판정이 누군가에겐 가슴 벅찬 행운도 되는구나. 그래서 피투성이 가운데 살아남은 세 단어는 원망에 찬 고성이나 비
2020.06.03(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심퍼시의 시대에서 엠퍼시의 시대로
수컷 펭귄 두 마리가 사랑에 빠지는 동화 ‘사랑해 너무 사랑해'는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른 암수 펭귄들이 알을 품어 낳은 아기를 키우는 것을 본 두 수컷 펭귄은 둥근 돌을 주워다 품기 시작하고, 이를 눈여겨본 사육사가 버려진 알을 둥지에 넣어주었다. 두 마리는 교대로 정성껏 알을 품어 마침내 아빠가 된다.이 그림책
2020.05.13(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코로나 이후, ‘더 나은 언어’를 생각한다
"21세기 엘리트들은 노동하고 전쟁할 대중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의료나 복지에 투자할 필요가 없어진다. AI로 인해 잉여 계급이 생기겠지만 기본 소득이 그 해답이 되기까지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유발 하라리가 2년 전 내한했을 때 했던 말이다. 이 예언은 코로나 이후 오히려 반어법이 되어 현실을 강타했다. 의료 복지를 삭감하고 생산성 신화를 이끌었던 영
2020.04.22(수)
|김지수 작가
[김지수 칼럼] n번방의 괴물과 이상한 나라의 성교육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합니다"라고 조주빈은 말했다. 그 말은 이상한 주술처럼 들렸다. 언론은 그가 던진 미끼를 물었고, 뉴스는 홍해처럼 갈라졌다. 수만 명의 관전자가 가담한 성착취 사건과 ‘손석희’ 이슈로. 원치 않는 ‘사과를 당하고' 구설에 오른 손석희 JTBC사장이나, 느닷없이 ‘감사를 받고’ 모골이 송연해진 국민이나 오물을 뒤집어
2020.04.02(목)
|김지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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