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요 게임사에 중국 자본이 안 들어온 곳이 없습니다.”

국내 한 대형 게임사 관계자의 말이다. 과장처럼 들리지만 실상에 가깝다. 중국 최대 인터넷·게임회사인 텐센트는 넷마블(17.5%), 크래프톤(13.6%), 웹젠(20.7%), 시프트업(4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주요 대형 게임사 중 이제 남은 곳은 사실상 넥슨 뿐이다. 텐센트는 최근 불거진 넥슨 인수설과 관련해 “지분 인수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업계는 “매각 직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며 우려한다.

자본 침투를 넘어 시장 주도권까지 넘어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센서타워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한국 모바일 게임 시장 매출은 3조3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 감소했다. 반면 중국 게임사들은 양적·질적 공세를 통해 국내 매출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과거 한국 게임사들이 주도하던 모바일 시장은 이제 ‘공략당하는 전장’이 됐다.

국내 일부 게임사들은 돌파구를 콘솔·패키지 시장에서 찾고 있다. 펄어비스의 ‘붉은사막’ 등이 글로벌 공략을 준비 중이지만, AAA(대형) 게임 시장 역시 경쟁이 만만치 않다. 중국 게임사들은 이미 ‘검은 신화: 오공’을 시작으로 ‘명말풍운’ ‘백서유기’ 등 후속 대작들을 예고하며 주도권을 노리고 있다. 중국 대작들은 그래픽, 물량, 기획력에서 미국·일본 게임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있다.

문제는 이들 대작 게임의 개발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슈헤이 요시다 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대표는 최근 팟캐스트에서 “PS5 세대 AAA 게임 예산은 PS4 시절보다 거의 두 배로 늘었지만, 기술적 도약은 제한적이고 리스크만 커졌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AAA 게임 개발 예산은 2억달러(약 2700억원)를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용현 넥슨 부사장(겸 넥슨게임즈 대표)은 최근 NDC(넥슨개발자콘퍼런스) 기조강연에서 “모바일·PC·패키지 게임 시장 모두 정체 또는 위기를 겪고 있다”며 “이제는 글로벌 강자들과 경쟁할 수 있는 ‘빅 게임’이 아니면 생존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AA 게임의 개발비는 1조원대에 달하고, 본전을 맞추려면 2000만장 이상을 팔아야 한다”고 했다.

국내 게임업계가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AA(중형) 게임’이다. AAA보다는 적은 수백억원대 예산으로 창의성과 실행력을 조화시킨 AA 게임은 스팀과 콘솔 플랫폼 양쪽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마케팅 부담이 적으며, 팬층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 IP(지식재산권) 생태계 구축에도 유리하다.

한국 게임은 콘텐츠 수출의 70% 가까이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다. 지금처럼 자본·시장·유통 모든 측면에서 해외 종속이 가속화된다면, 국내 개발력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게임 질병코드’ 같은 낡은 프레임에 갇혀 소모적 논쟁에 집중하는 사이, 국경 밖에서는 플랫폼, 유통, 퍼블리싱 주도권이 줄줄이 넘어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규제가 아니다. 콘텐츠 산업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개입, 그리고 국내 게임사들의 지속 가능한 생존 전략 마련이다. AA 게임은 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모바일 시장은 포화됐고, AAA 시장의 리스크는 크다. 반면 AA 게임은 적정 예산과 창의적 기획으로 장기적 성장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유효한 선택지다. 게임은 단지 오락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 산업의 미래를 떠받칠 수출 자산이자 기술 콘텐츠의 정수다. 이대로라면 한국은 게임을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게임을 전달만 하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