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초. 최근 홍콩 출장 중 현지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하며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로 결제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카드나 간편 결제와 다를 바 없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수단으로 쓰이고 있고 아프리카 등 몇몇 지역에서는 자국 화폐 대신 활용되기도 한다.

국내 주요 가상자산거래소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USDT 등)의 거래 비율이 20%를 넘어섰다. 일부 거래소에서는 비트코인보다 거래량이 많다. 투자자들은 원화를 스테이블코인으로 환전해 해외 가상자산거래소로 송금하고, 실질적인 투자 활동은 바이낸스 등 해외 거래소에서 하고 있다.

투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국내 가상자산시장의 경쟁력은 약화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가 대부분 해외 기업이라 문제가 생겼을 때 국내 금융 당국이 개입할 수도 없다. 이미 한국 투자자들에게 스테이블코인은 ‘기축통화’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홍콩은 8월부터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한 라이선스 제도를 시행하고, 싱가포르는 자금세탁방지와 공시 요건을 갖춘 사업자에 디지털결제토큰 라이선스를 부여한다. 미국 역시 주별 가이드라인과 연방 차원의 감독을 결합한 이중 규제 체계를 도입했다. 각국은 혁신과 안전을 동시에 추구하며 스테이블코인을 금융 인프라로 편입시키고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법적 정의와 규제 체계가 미비하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사실상 막혀 있고,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법적 지위가 모호하다. 이대로라면 국내 디지털 자산 생태계의 해외 의존도가 더 심화되고, 금융 주권도 위협받을 수 있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95% 이상이 달러 기반이라는 점은 원화 경제권의 잠식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도 있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을 담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하지만 이 흐름이 실질적인 산업 육성으로 이어지려면,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발행·유통·감독 체계를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해외 사례처럼 라이선스 제도 도입, 준비자산 요건, 발행자 신뢰성 확보, 자금세탁방지 등 핵심 규제 원칙을 정립하고, 혁신을 저해하지 않는 유연한 규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는 단순히 한 산업의 문제가 아니다. 금융 주권, 투자자 보호, 국가 경쟁력, 미래 금융 인프라의 근간이 달린 문제다.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제도 설계에 나서야 한다. 이미 시작된 변화의 흐름을 놓친다면, 한국은 또 한 번 ‘기회’를 내줄 수밖에 없다. 지금이 바로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의 골든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