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철학자 존 롤스(1921~2002)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원초적 입장’에서 각종 원칙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입장이란 서로의 사회적 지위나 계층, 능력 등을 모르는 상태다. 현재 처한 상황이나, 향후 처할 상황에 대해 서로가 모른다면 특정 집단에게만 이익이 되는 제도가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정의가 바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복잡한 이해관계와 경제·사회적 계층이 실재하는 현실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나 누구든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 제도가 약자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그의 이상만큼은 설득력을 가진다.
10개월째 지속 중인 티메프(티몬·위메프) 미정산 사태는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다. 티메프 사태는 단순히 한 기업의 부실 경영을 넘어, 한국 온라인 유통 구조 전반의 구조적 허점을 드러냈다. 플랫폼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를 잇는 단순 중개자를 자처했지만, 결제 시스템과 마케팅 등을 실질적으로 통제해 왔다. 동시에 구매자가 결제한 금액도 입점업체에 정산하기 전까지 별 제약 없이 운용해 왔다.
이처럼 플랫폼의 외형은 유통업이지만, 금융 위험을 내포한 기형적 구조로 돼 있었다. 재무 구조가 부실한 플랫폼이 채무를 갚지 못해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티몬과 위메프에서 판매 대금을 받지 못한 피해 입점업체는 총 4만8124개사, 미정산 누적액은 1조2789억원에 달했다.
편리함에는 늘 비용이 든다. 소비자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저렴하고 다양한 상품을 빠르게 구매해 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산 지연과 미지급, 입점업체 도산이라는 구조적 위험이 숨어 있었다. 입점업체가 줄줄이 무너지고 나면 결국 그 부담은 소비자에게 되돌아온다.
비슷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기 위해 법과 제도를 손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그 출발점은 당연히 정부와 국회가 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피해자들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선 안 된다”며 손발을 걷어붙이고 있다.
티메프 사태 피해자 모임인 ‘검은우산비상대책위원회’는 최근 ‘온라인 미정산·미환불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피해 회복·법령 제정 촉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 앞장서 구조 개혁을 외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들이 직접 나선 이유는 정부가 귀를 닫은 탓이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는 간담회를 열고 피해 금액이 큰 업체부터 일대일 면담을 통해 지원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정부에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공식적인 소통 창구조차 없다고 토로한다.
최근 만난 한 티메프 입점업체 사장은 “이러다가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때 뭘 하려고 하면 이미 늦은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이미 발생했다. 정부가 계속 기형적인 구조를 방치하는 건 미래의 또 다른 이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