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영에 대한 주주의 관심이 커지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주주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에 발맞춰 다가오는 주주총회 시즌에는 ‘주주제안’이 중요한 논제로 부상할 전망이다. 과거에는 주주제안이 기관투자자 또는 2·3대 주주가 최대주주의 독단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최근에는 소액주주들이 연대해 지분을 결집한 뒤 회사에 안건을 적극 제시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는 추세다. 적지 않은 기업이 주주제안을 접수했다는 소식이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들려오고 있다.
주주제안이 증가하면서 기업도 대응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 사실 기업의 장단점과 속사정에 대해서는 내부 관계자가 가장 정통할 것이다. 따라서 우선은 기업 내부에서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고민해 볼 것이다. 그래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될 때나 객관적인 의견을 얻고자 할 때 기업은 외부 전문가의 조력을 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우리 자본시장에서도 의결권 자문기관으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기본적인 직무는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분석을 수행해 주주권 행사에 도움이 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관투자자의 대리인 역할이 강조되고, 소액주주의 권익 옹호 운동이 증가하면서 우리 자본시장에서 많은 국내외 전문 의결권 자문기관이 자신만의 차별성을 내세우며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몸집이 커지고 분야가 확대되는 만큼 이들에게 전문가로서의 독립성과 책임이 요구된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이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삼성물산은 2024년 정기주주총회에서 해외 행동주의펀드로부터 주주제안을 받았다. 배당금을 대폭 인상하고 5000억원 규모의 자기주식을 취득하라는 내용이었다. 회사는 이러한 주주환원은 과도한 수준이라며 주주들에게 반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금 유출이 늘어나면 투자 재원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그로 인해 사업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의결권 자문기관들은 기업의 사정을 심층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주주환원 확대를 반기며 주주제안에 찬성을 권고했다. 다행히도 주주제안은 23%의 찬성표를 얻는 데 그쳤다. 주주제안이 가결됐더라면 국내 굴지의 기업이 성장동력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법률 이해도가 부족함을 알려주는 사례도 있다. 네이버는 2024년 3월 이사회가 사채 발행 권한을 대표이사에 위임할 수 있도록 하는 정관변경 의안을 정기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이러한 정관변경은 상법 제469조 제4항에서 허용하고 있고, 표준정관에서도 권장하는 적법한 방식이다. 그러나 의결권 자문기관들은 주주권익 보호 방안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근거로 들면서 반대를 권고했다. 의결권 자문기관의 분석과 달리 네이버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은 찬성표를 던졌고 주주총회 결과 해당 안건은 99%가 넘는 찬성률로 가결됐다.
해외 사례도 살펴보자. 테슬라는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의 스톡옵션 보상안을 2024년 정기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전례가 없는 역대급 보상안에 대해 의결권 자문기관은 주주 가치 희석이 우려된다며 반대를 권고했다. 하지만 실제 소액주주들은 일론 머스크의 성과를 칭송하며 찬성표를 던지고, 주주총회 현장에서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해당 안건이 가결된 후 테슬라 주가는 3% 상승하기도 했다. 의결권 자문기관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균형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듯 의결권 자문기관은 기업과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 이익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특정 집단의 관심만 편향되게 강조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여러 의결권 자문기관이 다양한 관점에서 견해를 제시해 줘야 한다. 특히 기업과 우리 경제의 발전을 위해 기업의 중장기적인 성장과 발전의 측면에서 주주총회 의안에 대해 타당성과 객관성을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의결권 자문기관의 육성과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기업의 주주총회 대응 전략이 변화하고 있다. 기업은 주주 요구에 방어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 먼저 주주에게 다가가 소통하며 상호 간의 이해도를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기업은 주주 의견을 경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주에게 기업의 장기 성장 전략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하고 가시적 전망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주주총회가 결론이 정해져 있는 의례적 행사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주주총회는 단순히 찬반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고민하고 경영계획을 함께 모색하는 소통의 장이 돼야 한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균형 잡힌 시각으로 기업을 바라볼 때 주주총회는 비로소 같은 곳을 지향하는 소통의 ‘아고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