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을 10년 이상 사용 중인 회사원 송모(40)씨는 이번 주말 휴대폰 성지로 불리는 이동통신 집단상가를 가족과 함께 방문하기로 했다. SK텔레콤의 위약금 면제 소식을 듣고, 온가족이 다른 통신사로 갈아타기 위해서다. 송씨는 “KT와 LG유플러스의 역대급 보조금 지급이 예상된다는 이동통신 유통점 직원의 전화를 받고 가족과 함께 상담을 받기로 했다”며 “신형 휴대폰을 거의 공짜로 바꿀 수 있는 이런 기회는 잘 없을 것 같다”라고 했다.
해킹 사고가 알려진지 70일이 넘었지만 SK텔레콤은 해지 위약금을 내세워 다른 통신사로 옮기려는 가입자들의 발목을 잡아왔다. 위약금을 면제하라는 국민과 국회 비판에 직면하면서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유영상 SK텔레콤 사장은 위약금 면제에 대해 끝내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정부가 위약금 면제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그동안 SK텔레콤의 ‘시간 끌기’에 분노했던 가입자들의 통신사 이동이 가능해졌다. 업계는 위약금 면제로 시작된 통신사 이동이 이동통신 시장의 대격변을 일으킬 촉매제가 될 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4일 SK텔레콤은 해킹 사고를 처음 인지한 4월 19일부터 이달 14일까지 위약금 없이 해지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잔여 약정기간에 따른 차등도 두지 않았다. 이 기간 안에만 해지하면 누구든 위약금을 물지 않는다. 기존에 위약금을 내고 해지한 가입자는 돈을 돌려받을 수 있고, 14일까지 해지한 가입자는 위약금이 면제된다.
70여일간 시간을 끌던 SK텔레콤이 갑자기 위약금 면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건 정부의 입장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SK텔레콤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해지 위약금을 면제해야 한다”며 가입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통신업계에 따르면 해킹 사태가 알려진 4월 22일 이후 약 60만명의 가입자가 SK텔레콤을 떠났다. 단기간에 이 정도 인원이 이탈한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사상 초유의 개인정보 유출 우려로 약정기간이 남았지만 위약금을 내고서라도 다른 통신사로 넘어간 고객이 급증한 탓이다. 하지만 이달 14일까지 열흘간은 약정기간이 남아있어도 위약금 부담 없이 다른 통신사로 이동할 수 있다. 복수의 통신업계 관계자들은 “향후 열흘 동안 통신업계 최대 규모의 가입자 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통신업계는 앞으로 열흘 간 이동통신 시장에서 SK텔레콤 가입자를 데려오기 위한 불꽃 튀는 판촉 경쟁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미 경쟁사인 KT와 LG유플러스는 갤럭시S25와 아이폰16 등 최신 단말기를 중심으로 공시지원금 상향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일각에선 SK텔레콤이 위약금 면제 기간을 오는 14일까지로 한정한 것이 22일부터 폐지되는 단통법(이동통신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22일부터 보조금 지급 제한이 사라지기 때문에 경쟁사와의 마케팅 출혈 경쟁으로 인한 손실 증가를 고려했다는 것이다.
본래 단통법 체제 하에서는 공시지원금과 15%의 추가지원금만 제공할 수 있다. 2014년 단통법 시행 초기에는 공시지원금은 최대 60만원으로 제한됐지만 시행령 개정 등을 통해 제한이 풀려, 단말기 출고가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책정이 가능해졌다. 오는 22일부터 단통법이 폐지되면 이마저도 상한선이 없어진다. 돈을 받고 휴대폰을 개통하는 이른 바 ‘마이너스폰’도 합법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이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학과 석좌교수는 “단통법 폐지 기간에 위약금 면제가 인정됐다면 가입자 방어를 위해 SK텔레콤의 마케팅비 지출이 급증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열흘간 KT와 LG유플러스의 역대급 마케팅비 지출로, 다수의 가입자가 SK텔레콤에서 이탈할 것 같다”라고 했다. 유영상 SK텔레콤 사장은 지난 5월 국회 청문회에 참석해 “위약금이 면제되면 최대 500만명이 이탈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