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톤 역삼 오피스./크래프톤 제공

크래프톤이 최근 일본 종합 광고 회사 ADK그룹의 모회사인 ‘BCJ-31’을 750억엔(약 7103억원)에 인수했습니다. 장병규 크래프톤 창업자 겸 의장이 올 4월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목표로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뒤 첫 대규모 투자입니다. 크래프톤은 인기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장기 흥행에 힘입어 올해 매출 3조원에 도전하고 있지만, 게임 사업에만 의존해서는 미래 성장을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 비(非)게임 영역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있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일본 ‘BCJ-31’은 ADK그룹 산하 주요 자회사를 보유한 ADK홀딩스의 모회사입니다. 이번 인수를 통해 ADK그룹이 크래프톤의 연결 계열사로 편입됩니다. ADK는 일본 3대 종합 광고 회사 중 하나로, 300편 이상의 애니메이션 제작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공동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는 ‘원피스’ ‘크레용신짱’ ‘도라에몽’ 등이 있습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ADK 매출은 약 1조2000억원을 기록했으며, 이 가운데 80%가 광고, 20%가 애니메이션으로 추정됩니다. 일본 광고 시장은 덴츠가 독점하고 있어 ADK의 광고 시장 점유율은 한 자릿수로 크지 않습니다.

크래프톤 측은 “급성장 중인 글로벌 애니메이션 시장과의 접점을 통해 게임 중심의 지식재산권(IP) 확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크래프톤의 게임 IP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거나 일본 애니메이션 IP를 게임으로 만드는 등 애니메이션과 게임 간 협업 가능성을 넓히고, 일본 내 콘텐츠·미디어 사업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ADK 인수는 국내 게임사의 콘텐츠 투자 역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크래프톤의 이번 투자는 게임업계의 IP 사업 확장 전략과 궤를 함께합니다. 그간 게임업계는 신작 흥행 여부에 따라 실적이 좌우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리지널 IP를 활용한 사업을 키우는 데 주력해 왔습니다. 게임 IP를 활용한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을 제작하거나 의류, 장난감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등의 시도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글로벌 애니메이션 시장은 2022년 3860억달러에서 연평균 5.5%씩 성장해 오는 2030년이면 5880억달러(약 796조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ADK의 애니메이션 기획·제작 역량과 크래프톤의 게임 개발 경험을 접목해 IP 사업을 확장한다는 구상입니다.

다만 국내 게임사의 콘텐츠 기업 투자·인수는 기대에 비해 성과를 내지 못해 실제 시너지 효과가 얼마나 날지는 지켜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앞서 넥슨은 ‘어벤져스: 엔드게임’ 제작사로 알려진 AGBO 스튜디오 지분 38%를 2022년 초 4억달러(당시 약 4800억원)에 사들였습니다. 이후 추가 1억달러 투자로 AGBO의 지분 절반에 가까운 49.21%를 확보했습니다. 넥슨은 ‘한국판 디즈니’라는 꿈을 안고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지만, 회사 순이익을 깎아먹는 리스크로 작용했습니다.

넥슨이 AGBO 투자 지분을 444억엔(약 3950억원) 손상 차손으로 인식하면서 2023년 ‘던전앤파이터’를 개발한 자회사 네오플의 순이익이 1319억원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2022년 순이익 7378억원과 비교하면 82.1% 줄어든 셈입니다. AGBO의 손상 차손으로 네오플이 타격을 받은 이유는 네오플이 출자해 설립한 넥슨US홀딩스가 AGBO 인수에 총 6000억원을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손상 차손이란 시장 가치가 하락해 회수할 수 있는 자산 가치가 장부 금액보다 낮아지면 이를 회계상 손실로 처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넥슨은 AGBO를 통해 자사 게임 IP를 영화와 TV 콘텐츠로 만들고자 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못했습니다. ‘퍼스트 버서커: 카잔’의 예고편 영상 제작에 AGBO가 참여했다는 것 외 게임과의 시너지 효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AGBO 투자를 주도했던 오웬 마호니 전 넥슨 일본법인 대표가 회사를 떠나면서 AGBO 기반 IP 전략도 재검토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컴투스도 콘텐츠 제작사 위지윅스튜디오를 2021년 인수했지만 뚜렷한 성과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컴투스도 지난해 총 1529억원의 무형자산 손상 차손을 반영했는데, 손상 차손의 대부분이 위지윅스튜디오에서 발생했습니다.

업계에서는 크래프톤의 ADK 투자가 게임 외 콘텐츠 분야에서 장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IP를 확보하는 동시에 일본 시장에서의 입지 확장을 노린 움직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크래프톤은 전체 매출의 약 90%를 해외에서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국내를 넘어 인도, 중국 등 해외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이고 있지만, 일본 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한 상황입니다.

이준호 하나증권 연구원은 “일본은 글로벌 게임 3위로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며, 애니메이션 부분에서는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중”이라며 “이번 인수를 기점으로 (크래프톤의) 일본 게임·콘텐츠 시장에 본격적인 진출을 예상하며, 향후 일본 게임사 등 추가 인수·합병(M&A)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크래프톤은 지난해 8월 일본 게임사 탱고 게임웍스를 인수하면서 해당 게임사의 하이파이 러시 IP를 확보하고 게임 개발 인력 50여명도 흡수했습니다.

게임업계에서는 4조원이 넘는 실탄을 보유한 크래프톤이 올해 공격적으로 M&A에 나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올 1분기 말 기준 크래프톤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5551억원이며,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당기손익-공정가치측정금융자산은 3조6554억원입니다.

크래프톤은 최근 카카오게임즈가 보유하고 있는 애드테크 기업 넵튠의 지분 39.37%를 1650억원에 인수했고, 지난해에는 숏폼 드라마 플랫폼 스푼랩스에 1200억원을 투자하는 등 비게임 분야 투자를 늘려 나가고 있습니다. 장병규 의장은 최근 ‘메가 IP’ 기반 브랜드 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비게임 분야에서 조단위 M&A를 검토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연구원은 “크래프톤은 지난 4년간 30건이 넘는 M&A를 진행했으나 인도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대부분 언노운월즈와 같은 게임 스튜디오 투자였다”며 “인도 외 지역에서도 비게임 사업 인수를 통한 글로벌 콘텐츠 사업을 진행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확인됐다”고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