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가 주요 인공지능(AI) 모델을 대상으로 ‘간이 테스트’를 했다. 자신이 출제한 중간고사 문제를 각 AI의 최상위 모델이 풀게 한 것. 시험 결과, 구글의 ‘제미나이 2.5 프로’가 74점을 받아 1위를 차지했다. 오픈AI의 ‘챗GPT’, 일론 머스크의 xAI가 개발한 ‘그록’, 앤트로픽의 ‘클로드’는 각각 41점, 42점, 15점을 기록했다.
제미나이 2.5 프로의 점수는 서울대 ‘컴퓨터 알고리즘’ 수업을 수강하는 실제 대학생과 비교해도 상위권인 6등에 해당했다. 문 교수는 “AI 모델마다 강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번 테스트 결과만으로 성능을 단정 짓기는 어렵다”면서도 “구글 제미나이의 성능이 크게 향상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생성 AI(Generative AI)의 기반이 된 ‘트랜스포머 구조’를 2017년 처음 제안하고도 여러 차례 체면을 구겼던 구글이 올들어 AI 분야에서 파상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신호탄은 4월 9~11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구글 클라우드 넥스트 2025’였다. 구글은 이 행사에서 AI 칩, 네트워크, 멀티 에이전트 플랫폼 등 신기술을 대거 쏟아냈다.
여기에 AI 모델 ‘제미나이 2.5 프로’의 성능이 입소문을 타면서 시장 선두를 지켜온 오픈AI를 긴장시키고 있다. 구글은 오는 5월 열리는 연례 개발자 회의 ‘구글 I/O 2025’에서도 안드로이드와 AI 관련 신기술을 공개할 예정이다.
구글, 사투 2년 만에 빛 발하나
지난해까지만 해도 구글은 AI 주도권 경쟁에서 한발 밀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글의 AI 챗봇 ‘바드(Bard)’는 2023년 첫 공개 자리에서 오답을 내는 바람에 ‘제미나이(Gemini)’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2024년 5월엔 오픈AI가 구글 I/O 하루 전에 ‘GPT- 4o’를 공개했다. 미디어의 관심은 오픈AI 발표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다른 흐름이 감지된다. ‘구글 클라우드 넥스트 2025′에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 제프 딘 구글 수석 과학자, 빈트 서프 구글 수석 인터넷 전도사 등 핵심 인사가 총출동,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7세대 텐서처리장치(TPU) ‘아이언우드’, 글로벌 사설망 ‘클라우드 광역 네트워크(Cloud WAN)’, 기업용 플랫폼 ‘버텍스 AI’, 에이전트 통신 규약 ‘에이전트 투 에이전트(A2A)’, 최신 AI 모델 ‘제미나이 2.5 플래시’까지 선보였다. AI 시장을 겨냥한 대규모 물량 공세였다.
행사에 앞서 발표된 제미나이 2.5 프로는 ‘사고(thinking)’ 과정을 거쳐 복잡한 수학, 과학, 코딩 문제 등에서 뛰어난 추론 능력을 발휘한다. 이 모델의 토큰 컨텍스트 윈도는 100만 토큰에 달한다. 경쟁 모델인 오픈AI의 GPT-4o 터보는 12만8000토큰, 앤트로픽의 클로드 3는 20만 토큰의 컨텍스트 윈도를 제공한다. 컨텍스트 윈도가 클수록 긴 논문, 코드, 대화 목록 등 방대한 정보를 맥락을 놓치지 않고 분석할 수 있다.
구글은 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 요금도 공격적으로 책정했다. 제미나이 2.5 프로의 경우, 입력 요금은 100만 토큰 기준 1.25달러(약 1770원·20만 토큰 이하), 출력 요금은 10달러(약 1만4000원)로 책정됐다. 20만 토큰을 초과할 경우 입력 요금은 2.5달러(약 3500원), 출력 요금은 15달러(약 2만1000원)다.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는 “구글이 검색 시장을 지키기 위해 AI 개발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복잡했던 구글 조직이 AI 중심으로 재정비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구글과 협력 관계에 있는 김학훈 날리지큐브 대표는 “구글은 장기적으로 광고 중심 비즈니스에서 구독 중심 비즈니스로 전환하려고 한다”고 내다봤다.
최근 미국 IT 전문지 ‘와이어드’는 “오픈AI를 따라잡기 위한 구글의 2년간 사투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구글 이사회는 AI 조직에 실시간 보고를 요구했고, 복잡했던 AI 조직(딥마인드와 구글 브레인)을 통합했다. 피차이 CEO는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해 조직의 긴장도를 높였고, 결과적으로 개발자의 근무시간을 늘렸다.
긴장하는 오픈AI, “크롬 인수하겠다”
구글의 거센 추격에 오픈AI도 경계 태세에 나섰다. 오픈AI는 최근 차세대 플래그십 모델 ‘GPT-4.1’을 출시하며 API 가격을 최대 75% 인하했다. 2024년까지 AI 시장을 주도하던 오픈AI가 구글 공세에 대응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구글발 가격 인하 압박으로 AI 모델 개발사의 출혈 경쟁도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오픈AI가 최근 후발 주자의 추격을 허용하는 것을 두고 지난해 오픈AI의 리더십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최고 과학자 일리야 수츠케버, ‘챗GPT의 어머니’ 미라 무라티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오픈AI 창업 주축들이 대거 퇴사했다. 현재 오픈AI 창업 멤버 11명 중 3명만 남아 있다.
다만 챗GPT 사용자 수는 오픈AI의 최대 무기다. 스튜디오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 생성 기능이 흥행을 기록하면서, 챗GPT의 주간 활성 이용자(WAU)는 5억 명을 돌파했다. 2024년 말 3억5000만 명 수준에서 약 3개월 만에 30% 이상 급증한 수치다. 황규종 웨이커 대표는 “오픈AI가 누리는 선점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며 “방대한 사용자가 생성하는 질의응답 데이터는 AI 모델의 학습과 개선 속도를 가속하는 핵심 자산”이라고 말했다.
오픈AI는 최근 ‘메모리 위드 서치(Memory with Search)’ 기능을 선보였다. 사용자의 과거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웹 검색 결과를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이 개인화 검색 기능은 고객 록인(lock-in)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의 한 기고가는 “챗GPT는 6개월만 사용해도 글쓰기 스타일, 프로젝트 이력, 업무 습관을 파악한다”며 “사용자 입장에선 다른 플랫폼으로 옮길 때 큰 전환 비용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구글이 제미나이 라이브의 카메라 및 화면 공유 기능을 모든 안드로이드 사용자에게 무료로 제공하기로 한 이유도 ‘사용자 확보 → 데이터 확보 → 품질 개선’이라는 선순환 고리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가운데 구글이 직면한 반독점 소송이 AI 패권 전쟁의 또 다른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구글의 인터넷 브라우저 ‘크롬’ 매각을 포함한 강력한 반독점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법원은 오는 8월까지 법무부가 제안한 내용을 중심으로 검색 시장에서 구글의 불법 독점 해소 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다. 앞서 4월 17일, 구글은 온라인 광고 기술 시장 반독점 소송에서도 패소했다.
오픈AI는 구글 크롬 브라우저에 대한 강제 매각 명령이 내려질 경우 이를 인수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오픈AI의 챗GPT 제품 책임자인 닉 털리는 4월 22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구글 반독점 소송의 구제 조치 심리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글 크롬 브라우저 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