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17일(현지시각) 선거 투표 연령을 만 18세에서 16세로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투표율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자, 참정권 나이를 낮춰 젊은 층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겠다는 계획이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통해 의회 민주주의 초석을 놓은 ‘민주주의 종주국’ 영국마저 정치 참여 문턱을 대폭 낮추면서, 16세 선거권이 전 세계적 흐름이 될지 주목된다.

영국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와 그의 아내 빅토리아 스타머가 2024년 5월 2일 영국 런던에서 지방선거가 실시된 투표소 밖을 걷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 정부는 이날 지난해 총선 공약 대로 다음 총선부터 16세와 17세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1969년 21세에서 18세로 투표 연령을 낮춘 이후 55년 만에 큰 변화다.

현재 영국 내 16~17세 인구는 약 150만 명이다. 영국 정부는 투표 연령을 낮추면 이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정치 과정에 대한 주인 의식을 심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인터뷰에서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오랜 민주주의 원칙을 근거로 들었다.

그는 “16세, 17세는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해 세금을 내고, 심지어 군에 입대할 수도 있는 나이”라며 “세금을 낸다면 그 돈을 어떻게 쓰길 바란다 거나,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국회의원이자 개혁 UK 당 대표인 나이젤 패라지가 2025년 3월 영국 버밍엄 유틸리타 아레나 버밍엄에서 열린 지방선거 출범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 참여도 저하는 서구권 선진국이 가진 공통적 고민이다. 영국에선 정치적 무관심이 확산하는 속도가 유독 빠르다.

영국 하원도서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치러진 영국 총선 투표율은 59.7%에 그쳤다. 2001년 이후 23년 만에 최저치였다. 직전 2019년 총선(67.3%)에 비해 단번에 7.6%포인트가 급락했다.

전문가들은 젊은 층 정치 외면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정부가 이들을 다시 정치로 끌어들이기 위해 16세 투표권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고 했다.

좌파 성향 공공정책연구소(IPPR) 해리 퀼터-피너 소장은 “영국 민주주의는 이제 위기에 처했다”며 “정치적 정당성을 잃을 만큼 위험한 순간에 이르렀다는 경고를 정부가 알아 차렸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2022년 5월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린 지방의회 선거에서 선거관리요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6세 투표권은 유독 파격적이거나, 낯선 제도가 아니다. 오스트리아, 브라질, 몰타, 에콰도르, 니카라과 같은 국가가 이미 전국 단위 주요 선거에서 16세 투표를 허용하고 있다. 독일과 벨기에는 유럽의회 선거에 한해 16세 유권자 참여를 보장한다.

영국 내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각각 2014년 분리독립 투표와 2021년 의회 선거부터 16세 투표권을 먼저 도입했다.

실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셰필드대와 에든버러대 공동 연구에 따르면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투표에서 16~17세 청소년들은 18~24세 청년층보다 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16세에 처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는 이후 선거에서도 계속 투표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조기 정치 참여가 ‘투표 습관’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사실로 입증했다.

2025년 5월 1일 영국 프레스턴에서 지방선거를 위해 투표소로 향하는 한 여성. /연합뉴스

영국 노동당은 현재 하원 의석 과반을 훌쩍 넘는 412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 법안 역시 의회를 무난하게 통과할 전망이다.

이르면 2029년 총선부터 영국 전역 16세 청소년들은 투표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문가들은 투표 연령 하향이 민주주의를 일으키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경고했다.

케임브리지대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 교수는 “단순히 투표권을 주는 것을 넘어, 학교 교육 과정에서부터 정치적 쟁점을 토론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는 시민 교육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5년 5월 영국 링컨셔주 그림즈비 타운 홀에서 투표원들이 그레이터 링컨셔 시장 선거 투표 결과를 집계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수당을 중심으로 한 반대 진영에서도 시기상조론을 제기했다. 이들은 “16세는 아직 정치적 쟁점을 깊이 이해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미성숙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 16세는 술이나 담배, 복권을 살 수도 없다. 선거에 직접 출마하거나,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는 법적 최소 연령도 모두 만 18세다.

이들은 ‘일상적인 안건에 서로 다른 법적 기준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투표권만 16세로 낮추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젊은 층 지지세가 강한 진보 좌파 정치 세력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투표 연령이 16세로 낮아지면 새 유권자가 약 150만명 정도 생겨난다. 전례를 보면 이들 정치 성향 상 대부분이 노동당이나 녹색당 같은 중도·진보 성향 정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