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축제 영국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 올해 노골적인 정치 선동과 혐오 구호로 얼룩졌다.

특히 공영방송 BBC를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되던 공연 중 반(反)이스라엘 구호가 터져 나오면서, ‘음악을 통한 인류 평화와 화합’이라는 축제 본질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29일(현지시각) BBC, 스카이뉴스 등 영국 주요 매체에 따르면 28일 글래스톤베리 웨스트 홀츠 무대에서 영국 국적 펑크 듀오 밥 빌런(Bob Vylan)은 공연 중 “죽음, 죽음을 IDF(이스라엘방위군)에게”라며 관중들과 함께 혐오 구호를 외쳤다. 이 장면은 BBC로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이어 같은날 다른 장소에서 공연한 아일랜드 삼인조 힙합 그룹 니캡(Kneecap)도 “팔레스타인 해방(Free, Free Palestine)” 구호를 외치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를 향해 욕설을 뱉었다.

영국 음악 듀오 밥 바일런의 멤버 바비 바일런이 28일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4일차 웨스트 홀츠 무대에서 공연을 하며 팔레스타인 국기를 배경으로 서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그룹 멤버 리암 오하나는 지난해 11월 런던에서 공연 중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깃발을 흔든 혐의로 이미 기소된 상태다.

영국 사법당국은 2019년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2021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2021년 각각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 이들 테러조직에 대한 공개 지지 표명은 테러방지법에 따라 최대 14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스타머 총리는 사전에 “(일부 아티스트는) 글래스톤베리 출연이 부적절하다”고 반대했지만, 주최 측은 출연을 강행했다.

영국 경찰은 해당 영상들을 검토하며 형사상 범죄 여부를 조사 중이다. BBC는 해당 공연을 재방송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스라엘 측은 이 발언을 “선동적이고 증오에 찬 수사”로 정의하고 공식적으로 “깊은 불쾌함”을 표명했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즈 오브 이스라엘은 “수만 관객 앞에서 ‘IDF에 죽음을’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극단주의적 언어를 정상화하고 폭력을 미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무대에서 헤즈볼라 깃발을 내걸었다는 혐의로 테러 혐의를 받은 니캡 리암 오하나(Liam Og O hAnnaidh로도 알려짐)의 멤버이자 모 차라(Mo Char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리암 오하나가 18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치안법원 밖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글래스톤베리는 1970년 시작돼 매년 영국 서머싯에서 열리는세계적인 음악축제다. 단순한 음악 행사를 넘어 유구한 역사와 상징성을 자랑한다. 매년 20만명이 넘는 관객과 4000여 아티스트가 공연에 참가한다. 축구장 500개 크기 부지에 설치한 120개 무대는 비상설 합동 공연장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를 뽐낸다. 이런 대규모 행사임에도 티켓은 판매 시작 몇 분 만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글래스톤베리 측은 이번 사태에 “경악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글래스톤베리는 “해당 아티스트들의 구호는 선을 넘었다”며 “글래스톤베리에는 반유대주의, 혐오 발언, 폭력 선동이 설 자리가 없다”고 강조했다.

글래스톤베리는 50년이 넘도록 자유와 평화,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적 가치를 온건한 방식으로 대변했다.

1981년부터는 핵무기반대운동(CND) 후원을 받았다. 이후 메인 무대에 해당하는 피라미드 스테이지 상단 평화(피스) 기호를 설치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했다.

올해 후원 역시 주로 옥스팜, 그린피스, 워터에이드 같은 진보 단체들이 맡았다. 글래스톤베리는 행사 수익금 가운데 약 190만파운드(약 32억원)를 매년 자선단체에 기부하며 음악축제로 순기능을 이어왔다.

굳이 특정 정치적 표어나 색채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이런 후원 방식을 통해 진보적인 색채를 유지하고 인류 통합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실현했다고 관계자들은 평가했다.

영국 유명 록 가수 로드 스튜어트가 29일 영국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마지막 날 피라미드 무대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배경으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음악 축제가 단순히 오락을 넘어 사회적 담론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지미 헨드릭스는 베트남 전쟁 반대 메시지를 전했다.

글래스톤베리 역시 브렉시트 반대, 기후 변화처럼 다양한 정치·사회적 쟁점에 목소리를 냈다. 2017년에는 제레미 코빈 전 노동당 대표가 무대에 올랐다. 2022년에는 주최 측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메시지를 상영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수준으로 정치화 움직임이 격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지난 4월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인기 록밴드 그린데이는 히트곡 ‘아메리칸 이디엇’ 가사를 트럼프 행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바꿔 불렀다. 사이키델릭 밴드 다크사이드는 미국 원주민을 거론하며 공연 중에 팔레스타인 지지 발언을 남겼다.

인기가수 제니 팬들이 지난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오에서 열린 코첼라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모여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런 정치적 발언이 축제가 품은 본질을 왜곡하고, 관객들 간 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현지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혐오 발언’ 경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공연을 보러 온 수많은 관객 앞에서 정치적 구호나 혐오 발언을 외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예술적 행위로 볼 수 있는지 여부를 가리는 논쟁도 뜨겁다.

글래스톤베리 설립자 마이클 이비스 경은 “행사의 정치적 성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