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요 대형은행들이 트럼프 정권 하에서 진보적 의제에 반대하는 이른바 ‘안티워크(anti-woke)’ 기조로 대응하고 있다. 공화당 집권 지역 주(州) 정부들이 총기 제조업체나 화석연료 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하는 은행 조치들을 ‘정치적 차별’로 간주해 공공 거래에서 배제하자 은행들이 관련 방침을 수정하거나 해명에 나서는 등 전략을 가다듬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24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JP모건체이스,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 미국의 대형 은행들이 최근 몇 주간 텍사스·오클라호마 주정부 당국과 잇달아 접촉, “정치적 판단이 아닌 재무적·법적·평판 리스크에 기반해 기업과의 거래 여부를 결정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은행의 ‘정치적 차별 행위’에 맞서 연방 정부와의 거래 제한 조치를 골자로 한 행정명령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여파로 풀이된다.

WSJ에 따르면 보수 성향의 주정부에서는 이미 ‘정치적 차별 행위’에 가담한 은행들에 대해 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다. 예컨대 텍사스와 오클라호마 주정부는 이미 총기 제조 및 화석연료·가스 기업과 거래를 제한한 은행들을 블랙리스트에 등록, 정부 차원 금융거래에서 배제한 바 있다.

토드 러스 오클라호마 재무장관은 “마가(MAGA·트럼프 열성 지지층) 은행이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은행들은 정치 이념에서 벗어나 철저히 금융에 기반한 기준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주정부들의 압박은 갈수록 강해지는 추세다. 플로리다주는 은행이 정치·종교적 이유로 고객을 차별할 경우 조직 해산이나 구조조정까지 가능하다는 조항을 법률에 명시했으며 테네시와 아이다호 또한 이와 유사한 법안을 이미 통과시켰다.

이에 은행들은 트럼프 제재에 앞서 내부 정책을 손보는 등 ‘중립 금융’ 기조로 선회하고 있다. 씨티그룹은 최근 그렉 애벗 텍사스 주지사와의 면담에서 ‘21세 미만에게 총기를 판매하는 기업과 거래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씨티그룹과 JP모건은 ‘정치적 이유로 기업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명문화했으며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은행 연합체인 ‘넷제로 뱅킹 얼라이언스(Net-Zero Banking Alliance)’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움직임은 업계 전체로 확산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2023년 말 석탄 관련 기업과의 거래 금지 방침을 철회했으며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웰스파고도 거래 제한 조치 완화를 검토 중이다. JP모건 측 대변인은 WSJ에 “정책 결정자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더 나은 은행 서비스 제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은행권이 정치적 사안을 이유로 거래에 차별을 두고 있다는 의혹은 이제껏 보수주의자 및 기독교 단체를 필두로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 역시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설에 참여했을 당시 “은행들은 보수 진영의 지지자들에게도 공평하게 문을 열어줘야 한다”고 발언하며 한차례 논란에 불을 지폈다.

트럼프와 은행권 간 개인적 마찰도 규제 검토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는 전임 바이든 정부 집권 당시인 2021년 3월 “정치적인 이유로 트럼프그룹 측 기업계좌가 일시 폐쇄됐다”며 캐피탈원 자회사를 직접 소송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 에릭 트럼프는 지난 5월 한 가상자산 행사에서 “일부 대형 은행들은 멸망해도 싸다”고 발언하는 등 은행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형은행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에 맞추는 한편 블랙리스트 지정 해제를 위해 주정부와의 대화 채널도 확대하는 추세다. 러스 장관은 “JP모건이 기후 관련 공동행위에서 탈퇴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면서도 “정치적·철학적 개입 없이 철저히 중립적인 금융기관으로 거듭나야 공적 거래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