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
이란이 수십 년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말이다. 최근 이스라엘과의 전면전 위기 속에서도 이 말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 해군 사령관은 지난 21일 “원한다면 해협을 봉쇄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세계는 긴장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좁은 물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주요 산유국 석유가 이 길을 통해 세계로 나간다.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 30%, 액화천연가스(LNG) 3분의 1이 이곳을 지난다. 특히 한국에 들어오는 중동산 원유는 99%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이곳이 잠기면 국제 유가는 배럴당 150달러를 넘보고 세계 경제는 마비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세계 경제의 숨통’이라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란은 말뿐이었다. 22일 이란 의회는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승인했다. 이후 봉쇄 위협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최종 결정권을 쥔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는 봉쇄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란은 1980년 이슬람 공화국 수립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전면 봉쇄해 본 적이 한 차례도 없다. 선박 통행을 제한적으로 방해한 사례가 전부다.
① 봉쇄 첫 희생자는 이란 자신… ‘경제적 자해’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국가는 역설적으로 이란 자신이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이란은 2023년 기준 석유수출국기구(OPEC) 4위 원유 생산국이다. 동시에 세계 3위 건성가스(dry natural gas) 생산국이다. 석유와 가스 수출은 이란 총수출 3분의 1을 차지하는 핵심 생명줄이다. 이 생명줄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난다.
26일(현지시각) 독일 국영방송 도이체벨레(DW)는 “이란이 해협을 봉쇄하는 것은 스스로 동맥을 끊는 것과 같다”고 분석했다.
이란은 미국이 시행 중인 강력한 대(對)이란 제재에 시달리고 있다. 이 와중에 이란 경제를 지탱하는 유일한 길을 스스로 막으면 자멸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이란산 원유는 약 90%를 중국이 사들인다. 원유 중개업자들은 이란산 원유를 다른 나라 원유와 섞어 원산지를 세탁한다. 주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원산으로 둔갑시킨다. 이란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중국이 지난해 수입한 말레이시아산 원유는 이전해보다 54% 급증했다. 이는 말레이시아 전체 원유 생산량을 넘어서는 양이다.
영국 기반 반이란 매체 이란인터내셔널은 “이란이 원유를 국제 시세보다 20%정도 싸게 중국에 팔고 있다”며 “제재를 무릅쓰고 구매하는 위험에 대한 보상”이라고 전했다.
이란산 원유는 중국 의존도가 현재 90%에 달한다. 2017년에는 25%였지만 2018년 미국이 제재를 재개한 이후 급증했다.
지난해 중국 원유 수입량은 하루 1110만배럴을 기록해 이전해보다 2% 정도 줄었다. 경기 침체에 접어들면서 원유 정제 활동이 둔화한 탓이다. 호르무즈 봉쇄로 공급마저 차질을 빚으면 중국과 외교적 대립만 심해진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란이 해협을 봉쇄하면 가장 먼저 화를 낼 사람들은 중국 정부”라고 말했다.
봉쇄는 이란 내수 경제가 무너지는 뇌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유가 폭등은 보통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동반한다. 전쟁으로 수도 테헤란 사회기반시설이 흔들리는 가운데,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 끓어오르는 민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② ‘종이호랑이’의 한계… 美 5함대와 전면전 각오해야
미 해군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불과 수백 km 떨어진 바레인에 제5함대 사령부를 두고 있다. 항공모함과 이지스함, 핵잠수함이 상시 대기 중이다.
자유로운 항행은 ‘핵심 국익’이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도는 5함대의 자유로운 항해를 막고, 곧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된다.
CNN은 “해협 봉쇄는 이란이 감당할 수 없는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촉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란 해군력은 고속정과 드론, 기뢰 등 비대칭 전력에 특화돼 있다. 이 전력으로 미 항모전단과 전면전을 붙어 이길 승산은 거의 없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물리적 봉쇄 자체도 쉽지 않다. 해협은 가장 좁은 구역 폭이 약 33km에 그친다. 유조선이 다니는 항로는 이란을 넘어 오만 영해에 걸쳐 있다. 이란이 단독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역은 제한적이다.
이란이 기뢰를 대량으로 살포해 항해를 방해해도,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군의 탐지 및 소해(掃海·기뢰 제거) 능력을 넘어서긴 어렵다. 결국 완전 봉쇄 대신 유조선 나포, 부분적인 기습 도발에 그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③ 낡고 철 지난 협상 카드…실리도, 명분도 잃어
이란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위협했다. 지나는 유조선들을 실제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유가가 급등하고 선박 보험료가 치솟는 와중에도 이란은 해협을 전면 봉쇄 하지 않았다.
호르무즈 봉쇄 위협은 실제 전술이라기보다 미국과 서방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협상책 가운데 하나였다. 핵 협상, 경제 제재 해제 등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지렛대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 카드를 쓴 셈이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호르무즈를 봉쇄하면 자국 경제 파탄은 물론 우호 관계인 중국, 석유 수출에 사활을 건 이라크·쿠웨이트 등 이웃 중동 국가들까지 적으로 돌려야 한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호르무즈 위협은 이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와 비슷해졌다”며 “너무 자주 반복해 더 이상 시장과 국제 사회에 충격을 주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란이 완전 봉쇄 대신, 예멘 후티 반군 같은 대리 세력을 통한 홍해 위협이나 해협 내 선박 나포 등 ‘저강도 도발’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