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미국 국채와 함께 ‘세계 최고 안전자산’으로 꼽혔던 일본 국채(JGB·Japanese Government Bonds)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방만한 정부 재정 운용으로 눈덩이처럼 국가 부채가 불어나자, 투자자들이 일본 국채 신뢰성에 의심을 갖기 시작한 탓이다.
싸늘해진 일본 국채 시장 분위기는 최근 잇따른 입찰 부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29일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전날 40년 만기 일본 초장기 국채 입찰에서 응찰률은 2.21배에 그쳤다.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응찰률은 국채 발행 예정액 대비 투자자들 응찰액 비율을 말한다. 이 비율이 낮을수록 인기가 없어, 높은 이자를 내고 국채를 찍어야 한다.
앞서 지난 20일 20년 만기 초장기 국채 입찰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당시 경쟁률은 2.5배로, 2012년 8월 이후 13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본 국채 인기가 떨어지면서 자연히 국채 금리도 치솟았다. 20년물 일본 국채 금리는 이달 들어 한때 연 2.575%로 25년 만에 최고치까지 올랐다. 30년물 금리는 일시적으로 3.2%를 넘나들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국채는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 속에서도 안정적인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했다. 일본은행(BOJ)은 공격적인 국채 매입과 초저금리 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과거 일본은 국채 대부분을 자국 내에서 소화하는 덕에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에도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일본은행을 비롯해 시중은행과 보험사, 연기금 같은 일본 국내 금융기관들이 국채를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충분한 수요는 일본 국채 금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외부 충격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 구조에 균열이 생겼다. 특히 만기 10년 이상 초장기 국채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2020년 20% 수준이던 초장기 국채 시장 외국인 보유 비중은 최근 50%에 육박했다. 전문가들은 금리 인상기를 겪어본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본 국채 시장에 공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수십 년간 초저금리만 경험했던 일본 투자자들과 달리, 일본은행 정책 변화 가능성에 주목한다. 안정적이었던 국채 금리를 흔들며 변동성에서 오는 단기적인 수익을 추구한다.
뉴욕타임즈(NYT)는 전문가를 인용해 “외국인 투자자 비중 증가는 일본 국채 시장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라며 “과거처럼 ‘일본 국채는 일본인이 갖고 있어 안전하다’는 인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본 국채 ‘최대 큰손’이었던 일본계 금융기관들마저 다시 국채를 사들이기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이들은 일본 국채 가치가 하락하면서, 이미 보유 중인 국채에서 막대한 평가 손실을 보고 있다.
28일 일본은행이 발표한 지난해 결산 보고에 따르면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의 장부가와 시가 차이를 나타내는 평가 손실 규모는 28조 6246억엔(약 248조원)에 달했다. 압도적인 역대 최대치다.
금융계에서는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마치면서 금리가 상승세로 돌아서자, 보유 국채 시장가치가 급락했다고 평가했다. 일본은행뿐 아니라 시중은행과 보험사 등 다른 금융기관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일본은행은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보유한 자금으로 이를 대부분 사들였다. 이제 이마저 쉽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최근 “일본 재정 상황은 과거 재정위기를 겪었던 그리스보다 나쁘다”고 말해 국채 시장 불안을 키웠다.
지난해 일본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국제통화기금(IMF) 추산 260%를 훌쩍 넘겼다. 주요 선진국 중 압도적인 1위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일본의 막대한 정부 부채 문제를 지적하며 “고령화로 인한 사회보장비 증가와 경기 부양을 위한 반복적인 재정 지출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일본 국채 금리 상승이 엔화 가치 하락과 일본 경기 침체 위기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채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 증가로 국가는 재정 운용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다. 공공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더 걷어야 하지만 경기 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뉴욕타임즈(NYT)는 “일본이 과거처럼 쉽게 지출을 늘리거나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졌다”며 “이는 공공 서비스 축소나 증세와 같은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