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 식탁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화려한 브런치나 스테이크 대신 저렴한 통조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특히 정어리, 고등어처럼 과거 주목 받지 못했던 생선 통조림들 인기가 심상찮다. 미국 매체들은 이를 고물가·고금리 시대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황형 소비’ 징후이자, 다가올지 모를 경기 침체 경고등이라고 분석했다.

CNN은 27일(현지시각) “저렴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통조림이 미국인 밥상을 점령하고 있다”며 “특히 정어리 캔 소비 급증은 경기 침체 신호(economic warning sign)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고 전했다.

프랑스 서부 두아르네스의 샹 세렐 정어리 통조림 공장에서 한 직원이 정어리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경제 위기 때마다 립스틱이나 매니큐어 같은 특정 상품 소비량 추이는 경제 상황을 예고하는 지표로 쓰였다. 이번에는 통조림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소비 심리는 바닥을 기고 있다. 미시간대 5월 소비자심리지수 예비치는 67.4를 기록해, 전달 77.2는 물론 시장 예상치였던 76.0을 크게 밑돌았다. 6개월 만에 최저치다.

경기 침체 우려는 검색량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통조림 생선(tinned fish) 단어 검색량은 지난해 연말을 기점으로 계속 상승세다.

특히 지난 90일 동안 포르투갈산 정어리 캔(Portuguese sardine cans) 검색량은 2750% 급증했다. 캐나다 유명 해산물 산지 뉴브런스윅에서 수입하는 브런스윅 정어리 캔(Brunswick sardine cans) 역시 4000% 검색량이 뛰었다.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이 의식적으로 저렴하고 영양가 높은 식품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대형마트에서 한 소비자가 가공식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본래 미국 통조림 시장은 참치 통조림이 주류를 이뤘다. 참치가 들어간 샌드위치나 샐러드는 미국인들에게 바쁜 일상 속 간편한 식사 대용으로 익숙한 메뉴다. 생선 통조림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붉은 육류 대체 단백질 공급원으로 널리 알려졌다.

반면 최근 통조림 열풍은 일상적인 선호도보다 가격 대비 만족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소비 심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포르투갈, 스페인 등지에서 들어온 알록달록하고 세련된 정어리, 고등어, 홍합 통조림은 젊은 소비자 사이에서 작은 사치를 통해 만족감을 얻기 좋은 쇼핑 상품으로 떠올랐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SNS)에서는 “스페인 마요르카로 호화로운 여름 휴가를 떠나는 대신, 스페인산 정어리 통조림으로 미식 여행을 즐긴다”는 게시글이나, 통조림을 창의적인 요리법으로 조리해 예쁘게 장식한 사진을 유행처럼 올리고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신선한 대안 상품을 찾으려는 소비 심리를 반영한 현상으로 풀이된다.

지난달 미국 LA 시내에서 트럼프 행정부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통조림 소비 급증은 과거 경기 침체기에 등장했던 여러 불황 지표와도 닮았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 당시 레오나드 로더 전 에스티로더 회장은 ‘경기가 어려울수록 여성들이 고가의 명품 가방이나 옷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립스틱 같은 작은 사치품을 구매하며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는 립스틱 지수(Lipstick Index)를 주창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남성 속옷 지수(Men’s Underwear Index)에 주목했다. 남성들이 경제적 압박을 느끼면 가장 먼저 눈에 잘 띄지 않는 속옷 구매부터 줄인다는 설(說)이다. 그린스펀 의장은 이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필수품 소비마저 줄일 만큼 경기가 어렵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통조림 소비 증가는 미국 내 식품 공급망에도 미묘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오래 전 문을 닫았던 미국 내 소규모 통조림 가공 공장들까지 다시 가동을 준비하는 경우도 감지된다고 CNN은 전했다.

해외 수입품에 대한 관세 문제와 인건비 상승으로 공급망 불안정성이 부각되자 ‘직접 만드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생산자가 늘어난 덕분이다. 새로운 투자 기회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