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러시아 남부 체첸 공화국을 철권 통치해온 람잔 카디로프(48) 수반이 시한부 상태에 놓였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오른팔’ 혹은 ‘충견’이라 불렸던 카디로프가 생사의 고비에 놓이면서 체첸의 향방이 큰 전환점을 맞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4일(현지시각) 러시아 독립 언론 노바야 가제타 유럽은 람잔 카디로프 수반은 췌장 괴사증으로 사실상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췌장 괴사증은 췌장 세포가 괴사하다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병이다.
카디로프는 2019년부터 이 질병으로 고통을 겪다 2023년 9월 급성 폐부전이 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후 1년 반 넘게 인공호흡기에 숨을 의존했다.
노바야 가제타는 “카디로프 건강 상태가 올해 2월 스탈린 시대 체첸인 강제 이주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했다”며 “20년 동안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라마단 종료 축하 메시지도 올해 3월 처음으로 내놓지 못했다”고 전했다.
비교적 젊은 48세 나이 독재자의 시한부 선고는 곧 불어올 거대한 후폭풍을 예고했다.
4일 뉴욕타임스(NYT)는 카디로프가 네 아들 가운데 셋째 아담(17)에게 권력을 넘기기 위해 3대 세습을 서두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카디로프는 2004년 피살된 부친 아흐마트 카디로프에게 권력을 물려 받았다. 카디로프에게 자기 뒤를 이어 아들에게 3대째 정권을 물려주는 미래 권력 승계는 가장 중요한 숙제다.
카디로프 삼남 아담은 10대 어린 나이지만 아버지를 닮은 큰 체구와 폭력적인 성향, 과속(過速)을 좋아하는 취향까지 고스란히 물려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아담은 형인 장남 아스마트와 차남 엘리보다 아버지 람잔의 공격적이고 잔혹한 성정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람잔은 아담이 15세였던 2023년 9월, 이슬람 경전 쿠란을 불태운 혐의로 수감된 재소자를 직접 구치소에서 무차별 폭행하자 이 영상을 직접 공개하면서 “아들 행동이 자랑스럽다”고 치켜세웠다.
아담은 같은 해 15세 나이로 체첸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받고, 11월 체첸 안보회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모두 최연소였다. 2024년 8월에는 체첸 최고 훈장에 해당하는 카디로프 훈장을 받았다. 현재 그는 대통령 경호실장, 체첸 특수부대 교육대학 관리자, 국방부 대대 감독관 등 여러 직을 겸임하고 있다.
아담은 지난 3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눈도장을 찍었다. 지난달에는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리며 지도자에 어울리는 ‘어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체첸은 러시아 남부 북캅카스 산맥에 위치한 이슬람 문화권 자치 공화국이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독립을 선언했지만, 러시아는 이 요구를 묵살했다.
그 결과 1994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만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희생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자 카디로프를 대리인을 세워 강압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
‘러시아의 화약고’로 불리는 체첸이 다시 흔들리면 푸틴은 권력 기반에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문제는 법이다. 러시아 연방법에 따르면 지역 정부 수반은 나이가 최소 30세를 넘어야 한다. 17세 아담이 바로 권력을 잡을 수는 없다.
아담의 아버지 람잔은 2004년 부친 아흐마트가 암살 당했을 때 28세였다. 람잔 역시 법을 지키기 위해 3년간 대리인을 세운 뒤 서른 살이 넘은 2007년이 지나서야 정식 수반으로 임명됐다.
미성년 독재자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기에는 푸틴 정권에도 부담이 크다.
중동 매체 알자지라는 체첸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푸틴이 아담의 후계자 지위 승계를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체첸 아크마트 부대를 지휘한 아프티 알라 우디노프 소장을 후계자로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언론 메두자는 “체첸이 자체적으로 헌법을 수정하거나, 아담이 30세가 될 때까지 명목상으로 섭정을 세우는 방안이 거론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카디로프 가문이 체첸 권력을 내려놓을 경우 이 지역이 다시 심각한 불안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카디로프는 지난 20년간 철권 통치를 하면서 잠재적 경쟁자들 싹을 잘랐다. 현재 체첸에는 카디로프를 대체할 만한 유력 인물이 사실상 없다.
미국 싱크탱크 제임스타운 재단은 올해 보고서에서 “카디로프가 사라질 경우, 그의 자리를 노리는 유력 하원 의원이나 의회 의장 같은 군벌이 피비린내 나는 내분을 벌일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는 푸틴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러시아는 현재 단기간에 끝날 거라 생각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출구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다. 코카서스 지방에서는 구소련 소속이었던 아제르바이잔이 탈(脫)러시아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이미 국력 소모가 극심한 상황이라 체첸에 또 다른 전선을 열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카디로프 지배 하에 잠복해 있던 체첸 분리주의 세력이 이 점을 노려 불확실성이나 갈등 조짐이 보이는 순간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에밀리 페리스 선임연구원은 “카디로프가 없는 체첸은 푸틴에게 거대한 골칫거리”라며 “크렘린은 미성년 독재자를 지지하거나, 통제 불가능한 권력 공백을 감수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