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업계에서 교황 같은 존재로 군림했던 미국 패션 전문지 보그(Vogue) 편집장 애나 윈터(75)가 1988년 이후 37년간 지켜온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영국 BBC는 26일(현지시각) 윈터가 미국 보그 편집장 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다만 보그 모회사 컨데나스트에서 최고 콘텐츠 책임자(CCO)와 보그 글로벌 에디토리얼 디렉터직은 당분간 유지한다.
윈터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바로 그 악마 같은 편집장 실제 모델이다. 별명은 ‘핵겨울(Nuclear Wintour)’.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단발머리와 얼굴 절반을 가리는 큰 샤넬 선글라스를 끼고, 별명처럼 냉철하고 단호하게 패션계 흐름을 결정 지었다.
패션에 관심 없는 소비자라도 윈터가 40년 가까이 패션업계에 떨친 영향력에서 자유롭긴 어렵다.
패션 전문가들은 윈터가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 하이엔드(고급) 패션을 민주화했다는 점을 꼽는다.
윈터는 1988년 11월 편집장으로서 처음 선보인 보그 커버에서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당시 커버 모델은 1만달러(약 1400만원)짜리 크리스티앙 라크루아 브랜드 오뜨꾸뛰르(Haute Couture·최고급 맞춤복) 상의를 입었다. 윈터는 이 비싼 상의에 50달러(약 7만원)짜리 게스 청바지를 짝지었다.
이전까지 보스 커버는 고가품으로 가득 찬 그들만의 리그였다. 일상복인 청바지, 그것도 저렴한 브랜드 제품이 초고가 브랜드 상의와 한번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윈터는 2012년 인터뷰에서 “그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우아하고 세련된 클로즈업 사진과 달랐다”며 “당시 인쇄업체가 이 커버가 정말 의도된 것인지, 혹시 실수로 청바지를 입힌 건 아닌지 출판사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고 회상했다.
이 생소한 조합은 이후 ‘하이-로우(High-Low)’라 불리는 패션계 표준이 됐다. 값 비싼 고가품을 액세서리 삼아 저렴한 레디투웨어(Ready-to-Wear) 기성복을 돋보이게 입는 스타일은 이제 낯설지 않다.
윈터는 모델만 등장하던 패션 잡지 커버에 배우나 가수 등 유명인을 거리낌없이 기용했다. 패션 모델보다 인지도가 높은 유명인을 내세워 잡지를 대중문화 중심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 결과 과거 여성 문화 한 켠에 머물렀던 패션은 대중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요소로 성장했다.
윈터는 부임 이후 경쟁지 엘르(Elle)에 밀렸던 보그를 단숨에 1위로 끌어 올렸다.
높아진 순위에 맞춰 윈터 영향력도 잡지를 넘어 패션업 전체를 아울렀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패션계를 움직이는 킹메이커를 자임했다.
윈터 눈에 든 무명 디자이너는 하루아침에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하곤 했다. 디올과 메종 마르지엘라를 전성기로 이끈 존 갈리아노, 천재성을 뽐낸 알렉산더 맥퀸, 미니멀리즘 대가 마크 제이콥스 등이 윈터를 거쳐 탄생한 대표적 인물이다.
윈터는 변변치 않은 경력을 보유했던 갈리아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재정적 후원자를 소개해줬다. 마크 제이콥스가 패션쇼 열 곳을 찾고 있을 때는 당시 부동산 재벌이었던 도널드 트럼프에게 플라자 호텔 한쪽 공간을 빌려 달라고 직접 권유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윈터는 디자이너, 유명인, 자본을 잇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스스로 구축했다”고 전했다.
유럽 중심이던 패션계 지형도에 뉴욕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윈터 덕분이라고 패션업계에선 평가한다. 뉴욕 패션위크는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영국 런던에 이어 매년 마지막에 열렸다. 가장 늦게 열리는 만큼 표절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유행에서도 가장 뒤처진다는 오명이 잇따랐다.
윈터는 패션계에서 미국 신진 디자이너들이 배제되는 상황을 거부했다. 그는 유럽에서 열리는 패션위크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한마디에 뉴욕패션위크는 여성복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열리는 쇼로 바뀌었다.
윈터는 디자이너에게 누구보다 따뜻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영화가 묘사했듯, 윈터의 완벽주의적이고 권위적인 리더십은 수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윈터와 일한 직원들은 보그 기준에 맞춰 날씬하고 미학적인 복장을 입어야 했다.
2020년 뉴욕타임즈가 윈터와 일했던 유색인종 패션 에디터 18명과 인터뷰를 한 결과, 이들은 ‘안나가 편집장을 30년 넘게 맡고 있는 동안 보그에 차별이 만연했다’며 ‘예쁘고 마르고 부유한 명문대학교 출신 백인 여성만 우대했다’고 전했다.
같은해 미국 전역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불어닥칠 때, 윈터는 또 한번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로 비판 받았다. 흑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윈터가 재직한 수십 년 동안 보그가 흑인을 포함해 유색인종 작가, 사진가, 디자이너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비난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또 보그가 백인 중심 미적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당시 윈터는 내부 이메일로 “보그가 유색인종 크리에이터들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했다”며 “상처를 주고 편협했던 점을 인정한다”고 과오를 인정했다.
패션업계는 카리스마 넘치는 편집장 한 명이 패션계 전체를 좌우하던 시대는 윈터를 끝으로 이제 막을 내렸다고 분석했다.
영국 매체 인더스트리 패션은 “윈터 퇴진은 패션 미디어 권력이 중앙집권적인 모델에서 인플루언서나 연예인처럼 분산된 네트워크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