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앞글자를 딴 ESG가 국내외 기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ESG 중에서 지배구조 부문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ESG 평가에서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주요 기업의 지배구조 현황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경영권 승계가 큰 차질 없이 마무리되면서 그룹 총수에 오른 정의선 회장은 현대차그룹을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환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더 눈길이 쏠린다.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큰 과제를 마무리해야 신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안정적인 경영권 기반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총수 일가가 가진 주요 계열사 지분율이 매우 낮은 데다,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순환출자(A →B→C→A 식의 연결 고리를 통해 기업을 지배하는 구조) 고리를 끊지 못한 기업집단이다.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한 삼성이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SK(034730)·LG(003550)·롯데와 달리 큰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전기차, 수소차 전략에 대해 발표하는 모습./현대차 제공

◇ 지배구조 단순화·정의선 체제 구축이 과제

앞서 현대차그룹은 2018년 3월, 현대모비스(012330)를 그룹의 최상위 지배 회사로 만들어 순환출자 고리를 모두 해소하는 내용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놓았다. 현대모비스의 핵심(모듈·AS 부품)사업을 현대글로비스(086280)와 합친 뒤 총수 일가가 가진 글로비스 지분을 매각한 자금으로 모비스 주식을 매입한다는 것이다.

기아(000270)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해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현대차로 이어지는 핵심 순환고리를 끊고, 현대제철(5.8%), 현대글로비스(0.7%)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인수해 현대모비스→현대차→현대글로비스→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고리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제철→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고리도 해소한다는 복안이었다.

이는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면서 주요 계열사에 대한 총수 일가 지분율을 높여 자연스럽게 지배력도 강화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현재 현대차(005380)와 현대모비스는 그룹 핵심 사업을 영위하면서 지배구조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두 회사에 대한 정 회장의 지분율은 각각 2.62%, 0.32%에 불과하다. 기아 지분도 1.74%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지분(현대차 5.33%, 현대모비스 7.15%)을 물려받더라도 핵심 계열사에 대한 정 회장의 지분은 모두 10%를 넘지 않는다.

또 산업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모비스를 전동화, 자율주행, 커넥티비티 등 핵심 기술을 갖춘 최상위 지배회사로 키워 그룹을 ICT(정보통신기술) 중심으로 변모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기업의 사업 구조도 고도화하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당시 사모펀드 엘리엇과 국내외 의결권 자문회사들이 총수 일가 외 주주 이익에 반한다고 반대해 무산됐다.

그래픽=이민경

◇ 총수 일가 지분 높은 글로비스 활용한 지배구조 개편 유력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난 4월 정의선 회장이 2대 주주로 있는 현대엔지니어링의 상장 작업이 추진되면서 그룹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재개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현대엔지니어링이 상장하면 정 회장이 1조원 정도의 현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금으로 정 회장은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핵심 계열사 지분을 물려받을 때 발생하는 세금을 납부하거나, 직접 계열사 지분을 매입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업계에서는 3년 전 나온 개편안처럼 정 회장이 최대 주주로 있는 글로비스 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대글로비스는 총수 일가의 지분이 높은 데다, 물류 사업을 통해 대규모 매출을 안정적으로 올리고 있다. 일부 주주들이 과거 개편안을 반대했던 만큼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분할과 합병 비율을 재조정하는 작업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현대글로비스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포함될 수 있는 상황도 맞물렸다. 개정된 법에 따르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은 총수 일가 지분율이 30% 이상인 상장사에서 20% 이상인 상장사로 확대된다. 이 규제를 받지 않으려면 연내 글로비스에 대한 총수 일가의 지분을 일부 매각해야 한다.

지난 2018년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반대했던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은 현대차그룹이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해 지주회사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현실성이 높지 않다. 현대차그룹이 지주사로 전환하면 금산분리법에 따라 현대캐피탈 등 금융 계열사를 매각해야 한다. 자동차 사업에서 상당한 시너지를 내는 알짜 금융 사업을 매각하기 쉽지 않다는 게 업계 평가다.

지금과 같은 순환출자 구조가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3년 전에는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라는 정부 압박이 거셌고 해외 투자자의 요구도 있었지만, 지금은 미래차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가 지속되고 있어 여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임은영 삼성증권(016360) 애널리스트는 “이미 존재하는 순환출자는 규제 대상이 아니고 2018년과 달리 정부와 정치권의 순환출자 고리 해소 요구도 강하지 않다”며 “산업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지배구조 개편보다 미래 기술 투자에 자원이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 애널리스트는 현대엔지니어링이 상장 작업에 나선 것은 최근 주식 가격이 크게 오른 시장 상황을 고려한 것이고, 총수 일가가 글로비스의 지분을 축소하는 움직임 역시 단순히 규제를 피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그래픽=정다운

◇ 주요 계열사의 총수 지분율 높일 필요… 지배권 강화 작업 진행 중

그럼에도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대한 관심은 지속될 전망이다. 정의선 회장은 2018년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추진할 당시 “지배 구조 개편은 현대차 미래 경쟁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했었다.

당장 주요 계열사에 대한 총수 일가의 지분율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그룹 체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외부 투기 자본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한계도 있다. 기업의 ESG 경영이 강조되면서 지배구조를 선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특히 순환출자 구조는 어느 한 계열사의 부실이 쉽게 다른 계열사로 전이되는 불안정한 형태라는 사실이 과거 많은 사례를 통해 밝혀졌다.

한편으로는 정의선 회장이 주도권을 쥐고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그룹 내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을 통합하는 등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작업도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말 현대차그룹이 미국 로봇 제조업체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사재 2400억원을 투자해 지분 20%를 확보했다. 현대글로비스도 참여했다. 업계에서는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할 경우 정 회장이 상당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그룹의 IT서비스 계열사 현대오토에버(307950)는 같은 계열사인 현대엠엔소프트, 현대오트론을 흡수·합병했는데, 이 역시 정 회장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현대오토에버는 정 회장이 현대글로비스, 현대엔지니어링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가진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