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란 매우 비싼 드레스를 입고도 티셔츠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ㅡ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1933~2019)는 럭셔리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화려한 겉모습보다는 실루엣과 비율, 내면의 태도와 정체성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었다. ‘적을수록 더 좋다(Less is more)’는 미니멀리즘 철학은 그의 유산 중 하나다. 과시는 피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고요한 우아함. 그것이 라거펠트가 정의한 ‘진짜 패션’이었다.

이런 철학은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폴 당장 에 피스(Paul Dangin & Fils)’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소유주인 장 밥티스트 당장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마시고 나서 생각하게 하는 샴페인이 아니라, 한 잔 마시면 미소 짓게 되고 한 잔 더 마시고 싶어지는 샴페인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되, 섬세하고 우아한 감각을 갖춘 샴페인. 그것이 폴 당장 에 피스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고급스러움’이다.

이 와이너리는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에도 등장한다. 만화 속 주인공은 폴 당장의 ‘당장 페이 브뤼’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조용한 안뜰에서 마시기 좋은 샴페인”이라고 평했다. 만화 주인공은 플루트 글래스 대신 레드 와인 글라스를 꺼내 “이 샴페인의 향을 즐기기엔 플루트 글라스는 지나치게 섬세하다”라며 “이 생산자는 샴페인의 우아함이 뭔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그래픽=손민균

폴 당장 에 피스는 14세부터 포도밭에서 일했던 폴 당장이 1947년 설립한 와이너리다. 최고의 포도를 재배하고 있으니 직접 와인을 만들어보자는 결심으로 시작됐다. 현재는 3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설립 2년 만인 1949년, 폴 당장 에 피스는 영국 왕실 납품업체 J&B(Justerini & Brooks)의 눈에 띄었다. 신생 와이너리가 오로지 품질로 승부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형 메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폴 당장 에 피스는 왕실에 ‘카르트 누와’를 공급했고, 이는 샴페인 하우스의 품질과 신뢰성을 상징하는 계기가 됐다.

와이너리가 자리한 코트 데 바(Côte des Bar)는 프랑스 샹파뉴 남단, 피노누아 주산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2015년 이 일대는 ‘샴페인 언덕, 하우스, 셀러(Champagne Hillsides, Houses and Cellars)’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포도밭, 마을, 지하 셀러가 어우러진 문화경관과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와인 산업이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폴 당장 에 피스는 이 지역에 약 50헥타르의 포도밭을 보유하고 있으며 피노누아, 샤르도네, 피노 블랑 등 샹파뉴를 대표하는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이 와이너리의 철학이 집약된 작품은 ‘뀌베 `47 골드(Cuvée `47 Gold)’다. 1947년 폴 당장이 처음으로 피노누아 100% 샴페인을 만들었던 순간을 기념해 70주년 스페셜 에디션으로 출시됐다. 모든 포도는 손으로 수확하며, 특히 뀌베 `47 골드는 60년 이상 된 나무에서 자란 최고의 포도만을 엄선한다. 전통적인 방식대로 포도를 압착한 뒤 첫 번째 원액만을 사용하며, 시음 후 가장 뛰어난 배럴만 골라 ‘골드’ 레이블을 붙인다. 나머지는 ‘실버’로 분류된다.

이 샴페인은 솔레라(Solera) 방식을 적용해 만든다.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배럴에서 일부씩 추출하고, 새 와인으로 채워 넣는 숙성법이다. 이는 주로 위스키나 셰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방식이고 일반적인 샴페인은 병 내에서 2차 발효를 거친 뒤 효모 숙성으로 완성된다. 와인에 이 방식을 적용하면 복합적인 깊이와 풍미가 만들어진다. 샴페인계의 전설인 자크 셀로스도 이 방식을 사용한다.

뀌베 `47 골드는 상쾌하지만 탄탄한 바디감을 갖고 있다. 밝은 노란색을 띠며, 부드러운 버블과 함께 바닐라 노트가 은은하게 퍼진다. 흰 꽃과 감귤류의 산뜻함이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가금류 요리나 익힌 생선, 샐러드, 초밥, 치즈와 같은 섬세한 요리와도 훌륭한 조화를 보인다. 2025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는 스파클링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은 아영FBC가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