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명품 그룹 케링(Kering)이 프랑스 자동차 기업 르노(Renault)의 최고경영자(CEO) 루카 데 메오(Luca de Meo)를 새 CEO로 전격 영입한다. 20년간 그룹을 이끌어온 창업주 일가가 경영 일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고, 자동차 업계 출신 외부 인사가 ‘명품 공룡’의 수장에 오르는 파격적 인사다. 가족 경영과 내부 승진 중심으로 임원 교체를 고수해 온 케링의 이번 행보가 명품 업계 전반에 ‘비명품’ 출신 경영진 영입 바람을 불러올지 주목된다.
30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에 따르면 케링은 오는 9월 15일 르노 CEO 루카 데 메오를 그룹 CEO로 선임한다. 프랑수아 피노 케링 창업주의 아들이자 지난 20년간 케링을 이끌어온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은 CEO직을 내려놓고 이사회 의장직만 유지한다. 케링은 창업주 일가가 오랫동안 경영 일선에 머무르며 구찌, 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키워냈다.
케링은 그동안 그룹 내 다양한 직무 경험을 쌓은 임원들이 승진하거나, 구찌·생로랑 등 산하 브랜드에서 성과를 낸 인물을 그룹 경영진으로 발탁하는 내부 인재 중심의 승계가 관행이었다. 이번 CEO 선임 과정에서도 브랜드 개발 담당 부사장 프란체스카 벨레티니, CFO 장-마르크 뒤플레 등 내부 인사가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이처럼 내부 승진과 산하 브랜드 출신 인재를 중용해 온 전통을 감안하면, 이번 외부 인사 영입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 배경에는 실적 악화에 대한 위기감이 있다. 케링은 올해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4% 감소한 38억8000만유로(6조2100억원)를 기록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2% 감소한 172억유로(25조 8900억원),영업이익은 46% 감소한 25억5000만유로(3조8400억원), 순이익은 62% 감소한 11억3000만유로(1조7000억원)를 기록했다. 케링 주가 역시 3년 전 대비 70%가량 하락했다.
데 메오 CEO는 30년 넘게 자동차 업계에서 일한 경영 전문가다. 도요타·피아트·폭스바겐·아우디 등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에서 요직을 거쳤다. 그는 2020년 르노에 합류해 ‘르놀루션(Renaulution)’이라는 대대적 구조조정과 혁신 전략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르노는 2020년 상반기에만 73억유로(11조5000억원) 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위기에 빠져 있었다.
데 메오 CEO는 2023년까지 수익과 현금 창출에 집중한 후 2025년까지 제품 라인업을 강화하고 르노 그룹의 비즈니스 모델을 테크, 에너지, 모빌리티를 중심으로 하는 혁신 기업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는 2023년까지 영업이익률 3%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2년 앞당겨 달성했다. 르노의 글로벌 판매량은 그가 지휘봉을 잡은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고, 수익성도 크게 개선됐다. 지난해 르노는 전 세계에서 약 226만대를 판매해 전년 대비 1.3% 성장세를 기록했다.
글로벌 투자사 번스타인은 “데 메오는 이제 다시 한번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라며 “투자자들은 그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얼마나 빨리 실현할 수 있을지를 주시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케링의 이번 결정은 명품업계 전반의 변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샤넬(CHANEL)은 2022년 유니레버(UNILEVER) 출신 인사 전문가 리나 나이르(Leena Nair)를 글로벌 CEO로 선임했다. 세계 5대 하이엔드 시계 제조회사로 꼽히는 스위스의 오데마피게(Audemars Piguet)도 2023년 P&G와 스위스 향수업체 퍼메니시에서 경력을 쌓은 일라리아 레스타(Ilari La Resta)를 CEO로 영입했다.
이처럼 소비재, IT, 자동차 등 전통적 명품과 거리가 먼 업계 출신 경영진을 잇달아 영입하는 것은 혁신적 경영 전략과 새로운 시각을 도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위기 대응을 위한 특단의 조치일 뿐 아니라 디지털 전환, 글로벌 수요 변화 속에서 명품 브랜드가 새로운 도약을 시도할 시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중 소비재 업계에서의 효율적 공급망 관리, 비용 구조 혁신, 디지털 전환 경험 등은 명품 브랜드의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된다”라며 “아울러 오랜 전통과 폐쇄적 문화가 강한 명품 업계에 외부 인재 영입은 내부 변화의 촉진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선 케링 그룹의 데 메오 CEO 영입에 대해 우려의 시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업계에선 산업 규모, 효율성, 뛰어난 엔지니어링 역량에 성공 여부가 크게 좌우되지만 하이패션은 서사, 문화적 특징 등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라며 “리더로서 갖춰야 할 능력과 덕목이 다르다”라고 말했다.
씨티은행은 보고서를 통해 “케링이 구찌와 생 로랑의 모멘텀을 회복하고 꾸준한 성장과 현금 흐름을 확보하기까지는 긴 여정이 필요할 것“이라며 ”실적이 부진한 브랜드를 되살리는 것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고, 소비자들은 명품 업계 선두 기업으로 몰리고 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