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앱)을 중심으로 파혼과 이혼 등을 이유로 고가의 가전제품을 저렴하게 파는 것처럼 속여 돈만 챙기는 사기 행각이 늘고 있다. 중고 거래 플랫폼 운영사들은 자율적으로 부정 거래를 제제한다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 “이혼으로 혼수가전 처분... 입금하면 설치 기사가 갑니다”
2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경북 포항에 사는 A씨는 지난 2월 중고 거래 앱 당근에서 최신 가전제품을 저렴하게 판다는 글을 보고 구매에 나섰다. 판매자는 이혼으로 1년도 안 쓴 혼수가전을 급하게 처분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A씨는 새것에 가까운 가전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LG 디오스 오브제 컬렉션 냉장고와 세탁기, 건조기, 에어컨, 스틱 청소기, TV, 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 6종을 총 480만원에 구매하기로 했다.
하지만 물건 수령 시기가 맞지 않았다. A씨는 사정상 5월에 물건을 가져갈 수 있다고 했고, 이에 판매자는 A씨에게 농협 계좌번호를 보내며 “이혼으로 파는 거라 기다릴 수 없다. LG전자 서비스센터에 위탁해 두면, 기사가 원하는 때 설치해 줄 것”이라며 빠른 구매를 종용했다. 그는 제품을 트럭에 실어 보내는 사진을 공유하며 A씨를 안심시켰다. 이 과정에서 A씨는 LG전자 설치 기사 명의의 안내 문자 메시지도 받았다.
그러나 물건을 받기도 전에 거액을 입금하는 게 불안했던 A씨는 LG전자 서비스센터에 해당 거래 건이 있는지 문의했고, 판매자 연락처로 등록된 이전 설치 건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LG전자 측은 A씨에게 “거래하기로 한 판매자가 전화를 받지 않고, 조회도 되지 않으니 거래하지 말고 신고하라”고 했다. A씨가 이 사실을 판매자에게 알리자, 판매자는 와이프 번호로 등록했다는 핑계를 대다, 도리어 A씨를 고소하겠다며 자취를 감췄다.
A씨는 “사진도 조작된 것이었고, 집 주소도 가짜였다”며 “알고 보니 비슷한 피해 사례가 많더라. 당근에 여러 번 신고했으나 잡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 사연 팔아 돈만 챙겨... 당근 등 중고거래 앱 사기 주의보
중고거래 앱에서 파혼과 이혼, 이별 등 개인사를 이유로 고가 가전제품을 저렴하게 파는 것처럼 속여 돈만 탈취하는 사기 행각이 늘고 있다. 판매자들은 인터넷에 도는 LG나 삼성의 가전제품 사진을 올려 자신의 물건인 척하거나, 공식 서비스센터에서 이전 설치를 위한 연락이 온 것처럼 문자를 보내 구매자가 계좌로 돈을 입금하게 유도한 뒤 연락을 차단한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파혼을 당해 세탁기를 170만원 판다’는 글을 보고 돈을 입금했다가 물건을 받지 못한 이도 있었다. 판매자는 직거래 대신 택배로 물건을 주겠다며, 구매자에게 선입금을 종용했다고 한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당근 파혼 사기’ 관련 검색량은 이달 들어 높은 증가세를 보였다. 중고 거래 소비자들 사이에선 사연을 팔아 사기를 친다는 의미로 ‘파혼 에디션’, ‘이혼 에디션’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이 외에 국내 소비자들에게 생소한 중국산 저가 가전제품을 쿠팡이나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 5배 이상 비싸게 등록한 뒤, 중고 거래 앱에 새 제품보다 비싸게 파는 전문적인 수법도 성행한다. 포털 사이트 가격 비교 검색에서 실제보다 비싸게 노출되게 해 구매를 유도하는 것이다.
소비자들 사이에선 이런 사기 행위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두고 조직화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한 소비자는 “검색을 해보면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사진과 문구로 가전제품을 판매한다”라며 “유사한 패턴으로 거래가 이뤄질 경우 플랫폼 차원에서 구매자에게 경고 메시지 등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 규제 사각지대 C2C... 공정위, 분쟁 시 법원에 개인정보 제공 추진
중고 거래 시장에서 이 같은 피해가 늘어나는 이유는 개인 간 거래(C2C) 플랫폼에서 분쟁이 발생할 때 이를 제재할 규제가 없는 탓이다. ‘소비자기본법’은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를 기준으로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고 있어, C2C에서 발생하는 소비자 피해를 단속하기 어렵다. ‘전자상거래법’에도 C2C는 적용되지 않는다.
업계는 그간 C2C 시장의 성장을 위해 규제보다 플랫폼의 자율적인 단속에 무게를 싣는 모습을 보였다. C2C 거래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소비자이기에, 법으로 규제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지난 2023년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소비자원은 당근과 함께 사용자 안전 확보 및 분쟁 해결을 위한 자율 준수 협약을 체결했다. 이의 일환으로 당근은 지난해 말 분쟁조정 사례집도 발간했다.
당근 측은 “정책을 위반한 게시물의 경우 키워드 모니터링 및 게시글의 패턴과 이미지를 학습해 판별하는 머신러닝(기계학습) 기술, 이용자 신고 등을 통해 가리고 있다”라고 했다. 모니터링을 벗어나는 게시글의 경우 탐지 패턴과 금칙어 리스트를 고도화하고 있으며, 전문 업자로 판별될 경우 서비스 이용 제한 등 제재를 가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중고 거래 시장의 거래 규모가 커지고, 피해 사례가 늘자 소비자 보호를 위한 제도를 정부가 마련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최근 공정위는 C2C 플랫폼에서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을 때 분쟁 해결 기구인 법원 등에 의무적으로 개인정보를 공개하도록 전자상거래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한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개인 간 거래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가 소비자라 국가 기관이 개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플랫폼이 자사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관련 가이드라인(지침)을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당근 관계자는 “판매 패턴이 다양해지는 만큼 이용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며 “해당 유형의 게시물을 발견할 시에는 적극적으로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