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8시 50분쯤 경기도 오산 롯데인재개발원 정문. 창문에 짙은 선팅을 하고 연두색 번호판을 단 검은색 법인차량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내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외부인의 출입은 통제됐다.
롯데그룹은 이날 오전 10시쯤부터 경기도 오산 롯데인재개발원에서 1박 2일간의 하반기 VCM(옛 사장단 회의)을 시작했다. 신동빈 회장과 그의 아들 신유열 미래성장실장(부사장) 등 80여 명이 모여 각 계열사의 상반기 경영 실적을 점검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하반기 경영 방침을 공유할 예정이다.
롯데 계열사 VCM은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 열렸다. 통상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하루씩 진행했다.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1박 2일로 확대하며 장소도 변경했다. 롯데그룹을 둘러싼 위기설이 고조되는 가운데, 신 회장의 엄중한 상황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VCM의 구체적인 의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통상 하반기 VCM에서는 식품·유통·화학 등 각 사업군의 총괄 대표가 부문별 사업 전략을 발표한다.
화학군에서는 한때 롯데그룹의 ‘캐시카우(현금 창출원)’였던 롯데케미칼(011170)의 사업 재편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2022년부터 올해 1분기까지 누적 영업 적자가 2조1310억원에 달한다. 올해 2분기에도 100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통 군에서는 계열사 롯데쇼핑(023530)의 본업 경쟁력 강화가 숙제로 남아 있다. 롯데마트는 올해 1분기 매출 1조184억원, 영업이익 67억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4%, 73.5% 감소했다. 롯데슈퍼 역시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7.2%, 73.3% 줄었다. 롯데쇼핑의 부진이 이어지자, 신 회장은 지난 3월 롯데쇼핑 주주총회를 거쳐 5년 만에 사내이사로 복귀하기도 했다.
식품군 계열사도 상황이 비슷하다. 롯데칠성음료는 올해 1분기 매출 9103억원, 영업이익 250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2.8%, 31.9% 감소한 수치다. 롯데웰푸드(280360)는 1분기 매출 9751억원, 영업이익 164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5%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56.1% 감소하며 수익성이 악화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올해 상반기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의 신용 등급을 일제히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한국기업평가는 최근 롯데케미칼의 기업 신용등급을 기존 ‘AA(부정적)’에서 ‘AA-(안정적)’로 하향했다. 롯데지주의 무보증사채 등급도 ‘AA-(부정적)’에서 ‘A+(안정적)’로 각각 낮췄다.
한국신용평가도 롯데케미칼의 무보증사채 신용등급을 ‘AA(부정적)’에서 ‘AA-(안정적)’로 내렸다. 롯데지주, 롯데물산, 롯데캐피탈의 무보증사채 등급은 ‘AA-(부정적)’에서 ‘A+(안정적)’로, 단기신용등급은 ‘A1’에서 ‘A2+’로 조정했다. 롯데렌탈도 ‘AA-(하향검토)’에서 ‘A+(안정적)’으로, 단기등급은 ‘A1’에서 ‘A2+’로 조정됐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11월 불거진 유동성 위기설 이후 고강도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다. 비핵심 자산은 과감하게 매각하고, 사업 구조조정에도 착수했다.
지난해 롯데그룹은 업계 1위였던 렌터카 계열사 롯데렌탈 지분 56.2%를 약 1조6000억원에 매각하고, 한때 그룹의 4대 미래 성장축 중 하나로 꼽혔던 롯데헬스케어(디지털 헬스케어 사업부)를 3년 만에 청산했다.
올해 들어서도 롯데케미칼은 파키스탄 자회사 지분을 현지 업체에 약 979억원에 매각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운영하는 코리아세븐도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사업 부문을 약 600억원에 매각했다. 롯데웰푸드도 자산 효율화를 이유로 충북 증평 제빵 공장을 매각했다.
조직 경량화를 위한 인력 감축도 이뤄지고 있다. 롯데는 지난해 말 정기 임원 인사에서 그룹 계열사 CEO 21명(약 36%)을 한꺼번에 교체했고, 전체 임원의 22%를 퇴임시켰다. 특히 실적 부진이 심각했던 화학 부문은 계열사 CEO 13명 중 10명을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쇄신이 이뤄졌다.
이밖에 지난해에는 롯데온, 롯데면세점, 세븐일레븐 등이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롯데웰푸드 역시 올해 4월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단행하는 등 인원을 감축했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불확실성 확대와 내수 시장 침체 장기화 등으로 경제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울 것”이라며 “혁신 없이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올해 1월 열린 상반기 VCM에서는 “지금이 변화를 이끌 마지막 기회임을 명심하고, 위기를 혁신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