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대학생이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같은 과 여학생을 짝사랑하다가 고백을 거절당하자 집에서 극단적 시도를 했고, 운 좋게 어머니에게 발견돼 대학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책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3권의 120쪽
37년간의 진료 기록을 4권의 책으로 펴낸 김철권 동아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사진=장윤서 기자

김철권 동아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어릴 적 꿈은 소설가였다. 세상을 훌쩍 떠난 어머니의 유언대로 의대에 진학했지만, 그는 진료실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지난 37년 동안 수많은 환자를 만났고 그들의 증상을 글로 기록했다.

이 방대한 기록은 지난 4월 네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1, 2, 3, 4′. 총 1400여 페이지에는 정신 질환 진료 사례와 치료법, 그의 진료 철학이 담겨 있다.

책에는 안타깝고 충격적인 사연들로 넘쳐난다. 가족에게 희생만 하다 우울증에 걸린 40대 가장, 배우자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불안증을 겪는 70대 노인, 사고로 아들을 잃고 죽은 자식의 옷을 입고 자는 50대 여성, 가정 폭력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해 마음의 병이 생긴 30대 여성, 부를 축적했으나 자식들을 믿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80대 기업 회장님 등등.

“사람들의 가슴에는 구멍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이유도 이 구멍을 메우려는 데 있죠. 욕망은 결핍이고 결핍은 구멍입니다. 그런데, 그 구멍을 어떤 것으로 메우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착각에 가깝습니다.”

지난 5월 31일 부산 동아대병원 동관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만난 김철권 교수는 인터뷰 내내 “마음의 구멍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해소하지 못해 각종 중독·환청 등 이상 증세로 고통을 받다 정신과를 찾는다는 설명이다.

김철권 교수는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치료하는 자타공인 정신질환 분야 권위자다. 1984년 부산대 의대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와 의학박사를 받았다.

1998년에 세계정신사회재활협회가 선정한 정신 재활 분야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100명의 정신과 의사에 선정되었고 세계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즈 후 (Marquis Who’s Who in the World)’에도 이름을 올렸다. 다음은 그와의 1문 1답.

─ 정신의학에 관한 이론서는 많지만, 사례를 바탕으로 쓴 책은 드물다.

“문득 진료실에서 많은 환자들과 나누었던 말, 그들과 나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곧 일종의 의무감으로 바뀌었다.

의료인 비밀 엄수 등의 이유로 의사가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 환자들에게 집필 취지를 설명하고 허락을 얻었다. 환자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환자 이름을 익명으로 기술했다. 책에 나온 에피소드만으로는 환자를 특정할 수 없도록 여러 장치를 뒀다.”

─ 4권의 책을 관통하는 단어가 ‘구멍’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의 구멍’이 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결핍이다. 사람들은 이 구멍을 연인, 가족뿐 아니라 소유물, 돈, 명예 등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게 욕망이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소유한다고 해서 결핍이 온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공허함, 외로움, 쓸쓸함을 완전히 없애줄 것이라는 환상을 대상에게 투영할 뿐이다. 신생아일 때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깨어 있을 때 꾸는 꿈을 우리는 환상이라고 부른다. 사실 낮의 환상과 밤의 꿈의 기능은 똑같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과 소원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로 자살을 시도한 남학생도 상대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는 환상으로 마음의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설사 여학생과 연인이 된다고 해서 자신의 결핍이 온전히 채워지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마음이 외롭거나 슬프거나 쓸쓸할 때는 자신의 가슴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그냥 그대로 인정해 보자.”

─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생각’이다. 고통스러운 것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 생각이 올가미처럼 당신의 온몸을 옥죄어 올 것이다. 고통에 대한 저항이 크면 클수록 당신의 고통은 심해진다.

흙탕물이 담겨 있는 그릇을 떠올려 보라. 흙탕물을 깨끗한 물로 만드는 방법은 그냥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지금 심각한 문제도 어느 순간 저절로 해결된다. 당신이 죽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고통도 그냥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불행하다는 느낌도 줄어들 수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견디면 된다.”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1~4권./안목 제공

─ 책에는 가족, 연인이 세상을 떠나 정신질환을 얻는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랑했던 대상이 사라지면, 우리 뇌는 그 대상에 쏟아부었던 에너지를 그와의 기억에 과도하게 투입하게 된다.

기억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 통제 불가능한 감정 상태가 되면 정신병을 얻는다.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때로는 타인에게 해를 가한다.”

─ 최근 20대 명문 의대생이 이별을 통보한 여자 친구를 강남 한복판에서 살해해 충격을 줬다.

“20대 학생뿐만 아니라 중년들도 이별이나 짝사랑 등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병원을 찾는 경우가 제법 있다. 그중에선 이별이나 상실을 견디지 못해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대체로 자신이 버림을 받을 것, 혹은 상대방을 다신 보지 못할 것이라는 슬픔을 감당할 여력이 없을 때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면 그 사람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건 결국 죽어서라도 하나가 될 것이라는 집착과 증오가 아닐까 싶다.

건강한 ‘자기애(自己愛)’가 있는 사람은 자살, 자학, 집착 등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 남학생도 스스로를 조금만 더 사랑했다면, 스스로에게 슬픔을 감당할 여력이 있다고 믿었다면, 이처럼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남학생을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라는 일각의 분석이 섣부를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 50대엔 부산대에서 예술학 박사 학위(영화 전공)도 취득했다.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면서 약물 처방과 일반 상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적지 않더라. 정신의학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더 깊게 이해하고 싶었는데, 평소 좋아하던 영화가 그 방편이 되었다. 거의 모든 인간의 유형은 영화에 있다. 영화감독들은 인간의 심리를 화면으로 보여주는 천재이자 정신분석가다.

나는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들과 말로 소통하면서 그 말 속에 숨은 욕망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읽는 좋은 도구이자 그 숨은 의미를 알려주는 해설서이다.”

─ 지크문트 프로이트나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가들을 직접 찾아다녔다고.

“정신분석 공부는 내 심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다. 나를 이해하는 건 환자를 이해하는 길이고, 환자를 이해하는 건 곧 나 자신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 분야의 석학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이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환자의 증상은 말로 쓰인 상형 문자다. 그것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그 환자의 욕망을 읽고 치료와 완치의 가능성도 열 수 있다. 내가 환자의 의자에 앉아 환자의 시선으로 상황을 볼 수 있도록 해 준 게 정신분석학 공부와 인문학 공부였다.”

─ 환자의 치료에는 어떤 도움이 되었나.

“그 덕분에 나는 거친 욕을 하는 남자에게 그 증상과 양립할 수 없는 동요 부르기를 과제로 내줄 수 있었다. 또 유행가 가사나 시를 음미하며 환자의 상황에 적용해 보도록 했고 웃음을 잃은 환자에게 마술을 보여주며 웃게 하는 처방을 할 수 있었다.

지나간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호소하는 노인에게는 젊은 날 행복했던 시절 찍은 사진을 함께 보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일깨워 주려고 했다. 전혀 씻지 않고 옷도 안 갈아입는 만성 정신병 환자에게는 외래에 올 때 목욕하고 정장을 입고 오도록 숙제를 주기도 한다.”

─ 타로, 마술, 사진 등을 치료에 활용한다는 게 인상 깊다.

“때로는 말보다 어떤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보다 뻔한 위로는 없지 않나.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난 오감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감각을 발달시킨다. 그 중에서 시각은 강력한 무기다. 의사는 백 마디의 말이 아니라 한 개의 그림에서 환자의 마음을 알 수도 있다.

환자도 타로에 나타난 자신의 감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37년간의 진료 기록을 4권의 책으로 펴낸 김철권 동아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사진=장윤서 기자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 이후 계획은.

“내년 2월 말 정년퇴임을 하고 3월엔 개원할 예정이다. ‘꼭 정신과 약을 처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나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개원을 하려는 것이다.

정신과 외래에서 실험해 본 결과 많은 신경증 환자와 일부 정신증 환자의 경우 약물 처방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약을 먹기 시작하면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가 환자에게 처방했던 약은 모두 먹어 보았다. 임상 현장에서 처방하는 용량에 비하면 극히 적었지만 그래도 직접 먹어 본 이유는 하나다. 환자들이 먹고 불편하다고 호소하는데 어떻게 불편한지 알아야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복용한 약 중 고통스러웠던 정신병 치료제도 있었다.

나이가 많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일수록 약을 선호한다. 오히려 그런 환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약만 먹도록 해야 한다. 지적 수준이 높고 자신의 병에 대해 의문이 많고 의자가 강하고 젊은 사람이면 신경증이든 정신증이든 약을 줄여 나가다 끊는 게 가능했다.

그동안 외래를 찾아온 환자를 대상으로 약을 덜 처방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률은 10%밖에 안 되었다. 진료 시간 부족으로 ‘당신은 왜 환자가 아닌가’를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탓이다. 개원을 하면 시간을 갖고 환자를 이해시켜 볼 예정이다.

다음 책은 ‘당신은 왜 정신과 약을 먹습니까?(가제)’가 될 것이다. 그게 의사로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 다시 태어나도 정신과 의사를 선택할지 궁금하다.

“서른 일곱 해 동안 정신과 의사로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환자였다. 진료실을 찾아온 환자를 통해 나는 삶의 진실을 배웠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사람의 정신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치료를 돕는 일을 한 것은 행운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된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축복이어서 나는 자다가도 일어나 좋아서 웃고 잔다. 모든 환자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기에 이번에 나온 책 역시 세상에 하나뿐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지혜와 의미를 일깨워 준 책 속의 주인공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진료실이 아닌 곳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술 한잔하고 싶다.

정신과 의사는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꿈도 이루게 해줬다. 내 삶이 곧 소설이었으니까. 괴로움과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태어나도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

김철권 교수는 정년 퇴임할 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의 책 7권을 내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랜섬웨어 공격으로 초기 10년의 진료 기록을 잃어 버렸다. 다행히 그가 블로그에 일기처럼 남긴 글이 있어 총 4권의 책을 낼 수 있었다. 책의 표지와 간지 사진은 김철권 교수가 직접 찍은 여행 사진에서 골랐다.

김철권 교수는 인터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40대에 돌아가셨거든요. 나는 이미 ‘어머니의 생보다 더 길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걸 깨달으니, 남은 생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자고 마음 먹게 되더라고요. 늙어서 밥 먹고 살아가는 데 큰 돈이 필요하지 않잖아요? 나이 들면 좋아하는 술도 별로 못 마시게 되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기록하다가 죽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