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익선동은 옛 한옥을 개조한 감성적인 카페와 식당으로 MZ 세대의 ‘핫플(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대전역 근처에 위치한 대전 동구 소제동도 최근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런데 대전시가 인근 재개발 구역에서 헐릴 위기에 처한 일제 때 지어진 철도 관사를 소제동에 이축(移築)한다고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청년층이 찾을 관광 자원을 확충하겠다는 취지인데, 이 계획에 현재 주민이 살고 있는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한옥을 허물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16일 대전시에 따르면 대전역 우측에는 재정비촉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대전은 경부선 대전역이 들어서면서 발전한 도시다. 지금도 한국철도공사 본사 사옥이 대전역 뒤편 소제동에 있을 정도로 한국의 철도 역사에 중요한 곳이다. 이 때문에 일제시대에 철도 직원들이 거주했던 관사가 지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대전역 인근 지역이 낙후되자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다.
문제는 대전역 인근 중앙 1구역과 삼성 4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면서 발생했다. 지역 사회에서 일제 때 지어진 옛 관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주민들은 ‘관사촌살리기운동본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일부 관사촌 소유주는 문화재청에 문화재 등록 신청을 하며 재개발 사업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결국 대전시는 소제동에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일부 관사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대전시는 철도 관사를 포함해 소제동을 명소로 만들 계획이다. 소제동 역사문화공간은 A~D구역으로 구분되는데, A구역에 역사 공원, B구역에 게스트하우스 등 숙박 시설, C구역에 철도 관사, D구역에 민간 상업 시설 등을 조성해 2만5000㎡(약 7500평) 규모 관광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소제동 A·B·D 구역은 이미 상당히 상업화가 진행됐다. 철도 관사를 리모델링한 카페와 식당이 들어섰고, 서울 익선동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온천집’ ‘치앙마이방콕’ 등 유명 식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주민도 많지 않아 사업 추진에 큰 문제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재개발이 진행 중인 중앙1구역과 삼성4구역에 있는 철도 관사를 소제동 역사문화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에 옮겨 짓는다는 사실이 C구역 주민들에게 알려졌다. 이곳에는 다른 구역과 달리 14가구 5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어 문제가 됐다. 지어진 지 100년 가까이 됐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한옥을 허물고 철도 관사를 이축해 문화시설로 활용하겠다는 게 계획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계획이 실행되면 살고 있는 집이 헐리게 되는 유준상(40)씨는 대들보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자신의 한옥이 1930년대에 지어졌다고 했다. 유씨는 “옆집은 조선시대 때 지었던 한옥을 자리를 옮겨 새로 지은 이력이 있는 한옥이고, 일제 때 지어진 목조 주택도 있다”며 “C구역은 빈 집이 거의 없고 사람이 다 살고 있다”고 했다.
대전시는 C구역의 기존 가옥을 철거하고 철도 관사를 이축하기 위해 주민들의 집과 땅을 매입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문화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공익사업이므로 수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유씨는 “기존에 있던 철도 관사를 그 자리에서 활용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며 “한옥을 허물고 주민들을 내쫓는다니 화가 많이 난다”고 했다.
지난 14일 소제동에서 만난 C구역 주민들은 대전시가 철도 관사 이축을 추진하면서 주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대전시가 관련 용역도 진행하고 전문가들과 논의해 결정되는 과정에서 정작 주민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산 신범호(73)씨는 “국가가 사유 재산을 보호해주지는 못할 망정 주민을 무시한다”고 했다. 지은 지 100년 가까이 된 한옥에서 살고 있는 박예숙(66)씨는 “나는 이대로가 좋다. 계속 자리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대전시는 개발 사업 초기 단계일 뿐이고,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대전시 관계자는 “(중앙1구역, 삼성4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철도 관사가 멸실 위기에 처했다”며 “너무 먼 곳으로 옮기면 관사의 문화적 가치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인근에 옮기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대전시는 소제동 C구역 토지를 수용하기 위해 주민들과 협의할 계획이다. 이 관계자는 “토지 수용 관련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예산 등은 정해지지 않았다”며 “주민들에게 사업 취지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고 했다. C구역 주민들은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른 토지 수용을 백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철도 관사도 자원이고 한옥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 자원”이라며 “다른 자원을 가지고 오겠다며 기존 자원을 부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대전시에 “일방적으로 어느 쪽 편만 들지 말고 행정을 잘 해야 한다”며 “과거의 모습을 차용하는 개발에서 지역의 어떤 역사성을 남길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