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4700만원. 한 슈퍼스타의 성장 과정을 함께 했던 에이전트가 그 대가로 얻게 된 돈이다. 장래가 촉망됐던 축구선수가 독일에 진출했을 때부터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에 자리 잡기까지 희노애락을 같이 했지만, 이제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돼버렸다.
토트넘 홋스퍼에서 뛰고 있는 축구 스타 손흥민과 아이씨엠스텔라코리아(구 스포츠 유나이티드)의 장기영 대표의 얘기다. 장 대표 측은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를 상대로 27억여원 상당의 정산금과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양측의 법정 다툼은 최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26일 서울고법 민사12부(부장판사 박형준·권순형·윤종구) 심리로 항소심 재판이 시작된 가운데, 에이전트 독점 계약서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11년 이어진 관계, 순식간에 정리된 계기는
사건의 발단은 지난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흥민이 독일 함부르크에 진출할 때부터 통역‧생활지원‧언론대응 등을 도왔던 장씨는 그 해 6월 드라마 제작사와 매니지먼트 사업 등을 겸하는 앤유엔터테인먼트(앤유)에 스포츠유나이티드를 매각하기로 했다. 앤유는 스포츠유나이티드 지분 전량을 118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먼저 57억원을 들여 49%를 양수한 뒤, 7월 초 61억원을 추가 지급하고 잔여 지분 51%를 사들이는 식이었다.
앤유는 이후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손흥민과 토트넘을 언급하며 투자설명회를 개최했는데, 이 설명회가 문제가 됐다. 손흥민, 스포츠유나이티드, 앤유는 각기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먼저 손흥민 측은 “계약서 없이 신뢰 만으로 스포츠유나이티드와 10여 년 간 관계를 유지했지만, 최근 기업 투자설명회에서 손흥민의 초상권을 동의 없이 사용해 신뢰가 깨졌다”면서 “스포츠유나이티드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하고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스포츠유나이티드는 “우리도 행사 개최 사실을 몰랐다”며 “앤유가 지분 인수 작업을 완료하지 않은 상태에서 손흥민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건 불법”이라는 입장을 냈다. 반면 앤유 측은 “스포츠유나이티드 지분 전량을 인수하며 손흥민 관련 마케팅 권리도 확보했다”며 “신규 투자자를 유치하는 자리가 아니었고, 기존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손흥민에게 거액을 베팅한 이유를 비공개 행사를 통해 설명했을 뿐”이라는 취지의 해명을 내놨다. 장씨와 손흥민 및 손앤풋볼리미티드(손웅정씨가 대표로 있는 회사)가 2018년 7월 맺은 국내외 광고 체결 권한·초상권 이용 권한 관련 독점 에이전트 계약이 앤유 측 주장의 근거가 됐다.
이후 장씨는 투자설명회를 귀책 사유로 앤유와의 주식 매매 계약을 해지하는 한편, 앤유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장씨는 사태 해결을 위한 발빠른 조치에도 불구하고 결국 손흥민의 관계를 봉합하지 못했다. 손흥민 측은 스포츠유나이티드와 독점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고 강조하며 관계 종료 의사를 밝혔고, 이에 장씨가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독점 에이전트 계약서, 1심의 최대 쟁점
1심 재판의 가장 큰 쟁점은 ‘독점 에이전트 계약서’의 존재 여부였다. 손흥민 측은 이 계약서를 본 적도 서명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장씨 측은 2018년 7월 세 사람이 같이 서명했다고 반박했다.
1심 재판부는 사실상 손흥민의 손을 들어줬다. 2008~2019년 손흥민이 국내외에서 광고 등 계약 체결을 할 때마다 금액의 10%를 장씨에게 지급하는 묵시적‧암묵적 계약, 일종의 ‘혼합계약’이 존재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손흥민 측에 유리한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장씨가 손흥민의 광고 계약을 체결하거나 초상권을 이용할 권한도, 이용을 허락할 권한도 없다고 판시했다. 또 필적 감정과 증인신문 등을 토대로 손웅정씨의 서명은 형태가 단순해 필적 감정만으로는 동일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손웅정씨뿐 아니라 손흥민의 서명을 따라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즉, 누군가 서명을 모방해 독점 에이전트 계약을 위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아울러 재판부는 손흥민의 계약 해지 통보가 적법했고 오히려 귀책사유가 장씨에게 있다며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장씨가 손웅정씨에게 회사 매각 관련 주식 매도 등 중요한 내용을 나중에 알렸으며, 손흥민 입장에선 에이전트의 매각으로 자신이 운동에 전념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의심하기 충분한 상황이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장씨가 추진한 것으로 보이는 일부 계약들만 추려 정산금 2억47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필적감정” 등 다툴 소지 여전... 공방 가중될 듯
양측은 항소심에서도 독점 에이전트 계약서의 유무를 놓고 다툴 전망이다. 1심 판결의 근거 중 하나였던 ‘필적’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앞서 2021년부터 영국에서 진행된 중재판정에서도 독점 에이전트 계약서에 있는 손흥민과 손웅정씨의 서명이 위조됐는지 여부가 관건이 됐는데, 중재판정부는 한국 1심 법원과 전혀 다른 판단을 내놓은 바 있다. 필적 감정을 통해 손흥민과 손웅정씨의 서명이 본인들의 필적이 맞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결국 작년 1월 중재 결정을 앞두고 손흥민 측이 장씨 측의 모든 주장을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합의가 이뤄진 바 있다.
26일 진행된 2심 첫 변론준비기일에서 장씨 측은 “필적에 대해 감정이 꼭 필요하다”며 필적 감정을 신청했다. 반면 손웅정씨 측은 “그 정도까지는 필요없다”는 취지로 맞섰다고 한다. 결국 재판부는 에이전트 측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계약서 서명의 진위 여부는 앞으로 열릴 재판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오는 7월 14일, 2차 변론준비기일이 열린다. 감정인이 출석하고 재판부와 양측 심문이 진행된다. 장씨 측은 그 전까지 재판부에 독점 에이전트 계약서 원본 등을 제출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장씨가 앤유와 주식 매매를 하는 과정에서 손웅정씨가 이를 알고 있었는지 여부도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장씨 측은 “앤유의 대표이사를 처음 소개해 준 사람도 손웅정씨고, 협상의 진행 과정 대다수를 공유했으며, 협의 하에 계약이 체결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반면 손웅정씨 측은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반박하는 상황이다. 양측 모두 항소이유서에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주식 매매 계약이 파기된 경위도 다시 한번 다퉈봐야 한다. 1심 재판부는 신뢰 관계가 깨졌다는 이유로 계약 해지를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장씨 측은 앤유의 투자설명회를 귀책사유로 삼아 주식 매매 계약을 상호 합의 하에 해지했고, 앤유 측에 손해배상도 청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