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나 횡령, 배임 같은 경제범죄는 자본주의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보이스피싱이나 전세 사기 같은 범죄는 서민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도 한다. 정부와 검경이 경제범죄와의 전쟁에 나서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수법 탓에 피해 건수와 액수는 매년 늘고 있다. 조선비즈는 경제범죄를 심층적으로 파헤쳐 추가 피해를 막고 범죄 예방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편집자주]
서울 중구에서 환전소를 운영하던 A씨는 지난 2020년 11월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범죄 집단의 총책 B씨가 A씨에게 접근해 ‘환치기(불법외환거래)’ 수법으로 보이스피싱을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B씨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시작하며 A씨에게 “한화를 현금으로 줄테니 한화에 상응하는 위안화를 중국 계좌로 송금해달라”고 했다.
이후 보이스피싱 수거책들은 같은 해 11월에서 12월까지 11회에 걸쳐 피해자들로부터 가로챈 2억3452만원을 A씨에게 전해줬고 이에 상응하는 위안화를 환치기 수법으로 B씨의 중국 계좌에 송금했다.
범행의 덜미가 잡힌 A씨는 사기방조·외국환거래법위반·증거은닉교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중 사기방조와 외국환거래법위반 혐의가 인정돼 지난 11일 서울동부지법 형사11단독(정원 부장판사)은 A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편법으로 해외로 돈을 송금하는 이른바 ‘환치기’가 보이스피싱과 해외불법도박 등 각종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환치기는 통상 통화가 다른 두 나라에 각각 계좌를 만든 후, 다른 국가에 만든 계좌에 돈을 입금하고 해당 나라 화폐로 바꿔 쓰는 수법으로 이뤄진다. 외국환거래법에 따르면 공인된 외국환은행만 외환 송금을 할 수 있으며 외환 거래 시 기획재정부에 사전 신고를 하도록 돼 있다.
환치기는 공인된 외국환은행을 거치지 않은 거래이기에 해외 송금의 목적을 알릴 필요가 없다.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환치기를 자본 유출로 간주해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외국인이 환치기 수법으로 돈을 몰래 들여왔다는 의혹을 받고 수사가 진행중인 경우도 있다. 27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외국인 C씨는 경남 일대 아파트 19채를 16억원에 사면서 6억원의 자금출처를 밝히지 못했다. 이에 관세청이 환치기 정황을 의심하고 C씨와 그의 한국인 배우자의 외환거래내역을 확인하는 등 현재 혐의를 수사하고 있다. 지난해 국토부는 2017년부터 2022년 9월까지 C씨의 사례와 같이 외국인이 해외자금을 불법으로 반입한 의심행위 121건을 적발했다.
최근엔 가상자산 시세차익을 노린 가상자산 환치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내 가상자산 시세가 해외보다 높은 이른바 ‘김치 프리미엄’ 현상을 이용해 돈을 벌고 해외로 빼돌리는 것이다. 해외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산 뒤 국내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비싼 값에 팔아 돈을 벌고 다시 이 돈을 해외로 보내는 것이다.
현행 외국환거래법에는 가상자산을 거래할 목적으로 외환 거래를 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 해외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해외 거래소용 현지 계좌를 만들고 해당 계좌에 돈을 부치려 해도 가상자산 거래 목적의 외환 거래 신고를 할 수 없기에 환치기로 투자금을 옮겨야 한다. 신고없이 해외 계좌로 돈을 보내고 해외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구매하면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하게 된다.
이달 11일 대구지법 형사8단독(이영숙 부장판사)은 외국환거래법·은행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일당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산 뒤 국내 거래소에서 판매하는 행동을 반복해 1조원대 차익을 챙겼다. 이 일당은 시세차익으로 번 돈을 유령회사 설립 등 법망을 벗어난 방법으로 해외로 빼돌렸다.
전문가들은 환치기가 외화 유출을 일으키며 각종 범죄 자금 유통에 활용된다고 말한다. 예자선 법무법인 광야 변호사는 “외국인이 국내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판매한 뒤 차익을 소액으로 창구에서 환전하거나 금으로 바꿔 빼돌리는 등 환치기로 인한 외화유출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정지열 전 한국자금세탁방지전문가협회장은 “범죄자들이 도박자금 등 거래 목적을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 환치기를 이용한다”고 했다.
정 전 협회장은 환치기 근절을 위해서 제도 개선과 함께 수사당국의 적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가상자산같이 새로운 방식의 자금 유통이 등장한 상황에서는 법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면서 “현재 기획재정부가 준비 중인 신(新)외환법은 가상자산 거래와 관련해 외환 거래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상자산 외환 거래가 이뤄질 수 있기에 환치기 요인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정 전 협회장은 “범죄 자금 유통을 목적으로 한 환치기는 신외환법으로 막을 수는 없기에 검경과 국세청이 환치기 행위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