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나 횡령, 배임 같은 경제범죄는 자본주의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보이스피싱이나 전세 사기 같은 범죄는 서민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도 한다. 정부와 검경이 경제범죄와의 전쟁에 나서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수법 탓에 피해 건수와 액수는 매년 늘고 있다. 조선비즈는 경제범죄를 심층적으로 파헤쳐 추가 피해를 막고 범죄 예방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편집자주]

금융기관을 상대로 대출금을 가로채는 범죄가 진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을 속여 대출금을 가져가는 형태의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최근에는 ‘작업대출’로 불리는 수법을 사용해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을 속여 범행을 저지르는 일당도 등장하고 있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서울서부지법 형사8단독(김우정 부장판사)은 사기 혐의로 기소된 A(41)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씨는 친척인 B씨와 함께 시중은행의 대출상품인 ‘사업자 가계행복대출’을 신청한 뒤 대출금을 가로채기로 했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의류업체를 운영하면서 8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가장해 국세청에 소득금액을 부풀려 신고했다. 또한 여러 개의 신용카드를 발급 받아 카드를 집중적으로 사용한 뒤 지인들로부터 받은 돈으로 카드대금을 결제해 일시적으로 신용등급을 높였다. 이후 이들은 금융기관들 사이에 대출 정보가 공유되기 전에 다수의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 등을 상대로 동시에 대출을 신청하기로 했다.

이들이 운영하는 의류업체는 매출이나 수입이 크지 않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았으며, 8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얻은 사실도 없었다. 그러나 A씨는 B씨의 지시에 따라 시중은행 소속 직원을 만나 사업자등록증과 2013년 소득금액증명을 제출하고 마치 정상적으로 원리금을 납부할 것처럼 가장해 대출을 신청했다. 이들은 이러한 수법으로 지난 2015년 2월 12일쯤 A씨 명의의 계좌로 3000만원의 마이너스 한도 대출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까지 14회에 걸쳐 총 2억5050만원의 대출금을 받아 가로챘다.

일러스트=손민균

A씨와 B씨처럼 금융기관을 속이고 대출금을 가로챈 범죄는 꾸준히 발생해왔다. 지난해 8월 18일 서울북부지법 형사8단독(김영호 부장판사)은 2016년 6월쯤 사업체를 운영한 것처럼 꾸며 국세청에 소득금액을 허위로 신고하고 금융기관 사이에 대출 정보가 공유되기 전 다수의 금융기관과 카드사를 상대로 한꺼번에 대출을 신청, 2억2300여만원의 대출금을 편취한 2명에게 각각 징역 8개월과 1년을 선고한 바 있다.

지난 10월 26일 대구지법 형사6단독(김재호 부장판사)은 은행이 대출 명의자의 직장 및 재직 여부에 대한 현장 조사 없이 서류와 전화를 통해 심사를 진행하는 점을 파고들어 허위 서류를 은행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2020년 5월쯤 1500만원을 가로챈 피고인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범죄자들은 우선 은행 대출 상품 중 개인사업자의 소득금액증명, 사업자등록증 및 신분증만 제출하면 개인신용등급 확인 후 별다른 대출심사 절차 없이 등급에 따른 금액의 대출이 쉽게 이뤄지는 점을 노렸다. 범죄자들은 대출요건이 되지 않음에도 정상적인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거나, 사업체를 문제없이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은행에 제출하기도 했다. 또한 전화 심사 시 직장, 급여, 매출 등에 대해 허위의 답변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출 신청을 받은 금융기관이 다른 금융기관에도 대출이 중복으로 신청됐는지를 파악하는데 시간상 공백이 발생한다는 점을 이용했다. 당시에는 금융기관이 대출실행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 제1금융권의 경우 1일이, 제2금융권의 경우는 2일가량이 소요됐었다. 피의자들은 금융기관들 간에 대출 정보가 공유되는 하루에서 이틀 사이에 다수의 금융기관과 신용카드 회사 등을 상대로 동시다발적으로 대출을 신청해 대출을 받았다.

은행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재는 이러한 형태의 범행이 어렵다고 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세청을 통해 허위로 증명서를 발급하면 은행 입장에서는 해당 증명서의 진위 여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도 “최근에는 은행연합회 전산 등을 통해 전 금융기관의 대출 잔액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신용정보 또한 바로바로 업데이트돼서 동시다발적으로 대출을 받는 수법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형태의 범행이 어려워지자 조직적으로 시중은행에서 사기성 작업을 통해 대출을 받아주고 수수료를 떼는 형태인 일명 ‘작업대출’로 수법이 발전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비대면 대출이 활발해지자 범죄 조직들은 급전이 필요한 2030을 모집해 이들에 대한 소득 등과 관련된 서류를 위·변조하고, 이를 금융기관에 제출해 대출을 받게 한 뒤 수수료를 받는 형식이다.

그러나 작업대출을 통해 대출을 받게 되면 수수료를 범죄조직에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대출금을 온전히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출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는 것은 신청인의 몫이라 위험성이 높다. 지난달 14일 대구 서부경찰서는 작업대출 일당 5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지난 8월 20대 2명에게 수천만원을 대출해줬다. 대출을 받은 20대 2명은 돈을 갚지 못했고, 작업대출을 지인에게 권유했다가 지인도 피해를 입자 죄책감에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공·사문서 위·변조를 통한 작업대출에는 가담하거나 연루되지 말아야한다. 적발될 시에는 대출모집인뿐만 아니라 대출 신청인, 즉 소비자도 피해자가 아닌 공범으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정보가 범죄에 사용될 수도 있다”며 “금융질서문란자로 등록된다면 예금계좌 개설 등 금융거래에 제한을 받거나 취업 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작업대출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