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0대 남성 A씨는 자신의 동거녀 B씨 소유의 1400만원 상당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 명품 시계를 몰래 한 대부업체에 맡기고 800만원을 빌렸다. 이 사실을 알아챈 B씨는 A씨를 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와 A씨 변호인은 두 사람이 동거하는 사실혼 관계로 이 사건이 ‘친족상도례’에 해당하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일러스트=손민균

친족상도례란 절도, 사기, 공갈, 횡령 등의 범행이 직계혈족·배우자·동거친족(8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동거가족 등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처벌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제외한 다른 가족 간 범죄는 고소를 해야 문제를 따져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족 간 분쟁에 법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로, 대가족 생활이 익숙했던 과거에 도입됐다.

최근 친족상도례를 악용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건들이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방송인 박수홍씨가 친형을 회삿돈과 개인 돈을 횡령한 혐의로 고소하자, 박씨 아버지가 “재산 관리는 자신이 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친족상도례를 적용 받아 처벌을 피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친족상도례 외에도 형법은 가족이나 친족이 범인의 도피를 돕거나 범행 증거를 없애는 경우 처벌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데, 라임 사태 주범인 김봉현의 도주를 도운 조카 역시 이 같은 ‘가족 면죄부’가 악용된 사례다.

A씨도 동거녀의 동의 없이 몰래 시계를 담보로 돈을 빌려 놓고서는 친족상도례를 통해 법의 처벌을 피하려 했다. 그렇다면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A씨가 친족상도례 적용을 받으려면 두 사람이 동거가족이거나 A씨가 B씨의 배우자라고 재판부가 판단해야 한다. 재판부는 남성의 지위를 ‘동거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남성이 자신의 집을 오갔기에 일시적인 체류에 불과하다고 봤다.

사실혼 관계는 친족상도례가 규정하는 배우자에 해당할 수 없다. 민법상 혼인신고를 한 사이만 혼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친족상도례를 이용해 법망을 피하려던 A씨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재판부는 A씨에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했다.

친족상도례는 친족 간 재산범죄가 늘고 있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과거 가부장적인 대가족 사회에 도입됐던 개념이 현재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원하더라도 일부 범행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벌 대상조차 되지 않는 상황도 부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조계 안팎에서도 개정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친족상도례 규정 개정을 검토하고 있냐는 질문에 “지금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친족상도례를 폐지하거나 전면 개정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친족상도례 조항의 완전한 폐지는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규정을 폐지할 경우 가족 간 문제가 지나치게 형사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헌법재판소에서도 2012년 헌법소원 당시 “가정 내부의 문제는 국가형벌권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책적 고려와 함께 가정의 평온이 형사처벌로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취지”라고 친족상도례의 합헌 결정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