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 ‘스테이블 코인’의 하나로 미국 달러와 연동되는 ‘테더(USDT)’를 미끼로 한 사기행각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단순히 투자 시 원금의 몇 배를 보장하는 기존 사기 수법과 달리 가격 변동에 따른 손실을 보장하는 대신 1~3% 수준의 이윤을 챙겨준다며 투자자를 현혹하는 방식이다. 피해자들이 수익을 확인하고 투자금액을 서서히 늘려가면 어느 순간 거래를 금지시키고, 투자한 암호화폐를 다시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추가 금액을 요구해 가로채는 신종 사기다.
부산에 거주하는 A씨는 지난 1월 10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암호화폐 투자를 권유하는 B씨를 만났다. B씨는 투자 시 원금의 2~10배를 벌게 해주겠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수익률은 기껏해야 1.4%, 많아야 3% 수준이었다. B씨는 큰 돈을 만지지는 못하겠지만 소소하게 용돈을 벌어보라며 투자를 권유했다.
A씨는 지난달 7일 시험 삼아 20만원을 투자해 보기로 했다. 투자 방법은 다소 복잡했다. 업비트 등 국내 거래소에서 암호화폐 ‘트론’을 구매하고, 이를 ‘아이엠토큰’이라는 개인 지갑을 거쳐 B씨 일당이 운영하는 ‘KBIP’라는 곳에 송금하는 것이다.
KBIP는 송금된 트론을 테더로 변환시켜주고, 트론이 거래소에서 KBIP로 송금되기까지 최대 26시간 동안 가격변동에 따른 손실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KBIP 측에 송금된 트론을 해당 홈페이지 내 ‘상점’에 판매하면 개인 계좌에 판매금액이 입금된다.
첫 투자로 약 1%의 수익을 챙긴 A씨는 서서히 투자금액을 늘려갔다. 계속해서 수익을 올리다 보니 자신이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투자금액이 1000만원을 넘어가자 KBIP는 갑자기 A씨의 거래를 정지시켰다. 내부 규정상 투자금액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2만테더(한화 약 2400만원) 이상만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만테더가 될 때까지 트론을 추가로 송금하지 않으면, 이미 송금된 암호화폐를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1000만원을 되찾을 수 없게 된 A씨는 울며 겨자먹기로 1000만원어치의 트론을 추가로 구매해 송금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래는 할 수 없었다. KBIP 측이 거래를 하려면 계정을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며 트론을 또 송금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A씨는 들어간 돈만 되찾자는 생각으로 추가 송금을 했으나, 이번에는 ‘VIP’ 인증이 필요하다며 추가 송금을 또 요구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A씨는 KBIP에 총 8800만원어치 트론을 송금했으나 돌려받지 못한 상황이다.
A씨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으로 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당한 피해자는 17명에 달한다. 피해 금액은 300만원에서 9500만원까지 다양했다. 피해자들에게 투자를 권유했던 이들은 외국인 여성으로 추정된다. 일부 피해자는 이들과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지만, 외국어를 사용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투자를 권유했던 사람들은 현재까지 소셜미디어(SNS) 활동 등을 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들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암호화폐 투자를 가장한 사기는 적지 않았지만, 이번 사기 행각은 기존보다 훨씬 교묘해졌다. 단순히 원금의 몇 배를 벌게 해주겠다는 식의 황당무계한 방식이 아니라, 적금 수준의 낮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투자자를 끌어들인 뒤 거래 자체를 중단시킨다. 국내 거래소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일반 암호화폐가 아닌 스테이블 코인을 미끼로 쓴 것도 특징이다.
비슷한 수법으로 피해를 당한 20대 C씨는 현재 1500만원이 KBIP에 묶여 있다. C씨는 KBIP에 송금할 트론을 구매하기 위해 부모로부터 돈을 빌린 상태다. KBIP는 C씨에게 거래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700만원어치의 트론을 더 송금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다른 피해자 D씨는 이번 투자를 위해 대출까지 받았다.
피해자들은 경찰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지만,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A씨는 지난달 18일 부산 동래경찰서에 사건접수를 했지만 한 달이 넘도록 담당 수사관이 배정되지 않았다. 동래경찰서는 지난 10일이 돼서야 A씨에게 “사건을 담당하게 될 수사관이 코로나에 확진됐다”며 “다른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A씨는 부산 금정경찰서에 같은 내용으로 사건접수를 했다.
A씨는 “신고한 지 한 달이 다 됐는데 늦게 수사해서 다 도망가고 나면 어이가 없을 것”이라며 “홈페이지도 계속 운영되고 있어 피해자는 계속 늘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