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오정주씨는 60세가 되던 2019년 경정으로 퇴임했다. 그는 1991년부터 2007년까지 중앙경찰학교에서 무도교수 및 학과장을 역임했고, 2012년부터는 서울 서대문경찰서 신촌지구대장 등을 지냈다. 2016년에는 경찰대학 무도교수로 재직했다. 지금껏 그가 키워낸 경찰관들만 수십만명에 이른다.

30여년 동안 경찰 생활을 했던 오씨는 퇴임 후 탐정업에 뛰어들기로 결심, 전직경찰탐정연합회를 만들었다. 경찰관으로 일하며 쌓은 각종 경험과 노하우를 탐정업에 활용한다면 일선 치안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은퇴 후 탐정 일을 하면서 소소한 용돈 벌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오씨는 “100세 시대에 비간부 기준 정년인 60세에 퇴임하면 아직 창창한 나이”라며 “은퇴 후 국민들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전직경찰탐정연합회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돈을 좇는다면 경찰탐정이 아니다”며 “국민과 안전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하려 한다. 봉사하고 용돈을 얻어 쓰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 로고.

◇ 은퇴하고 경비원?… 탐정으로 눈 돌리는 전·현직 경찰관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공인탐정 제도를 공약으로 내건 가운데, 오씨와 같은 전직 경찰관과 곧 퇴직을 앞둔 현직 경찰관들이 탐정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12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달 13일까지 경찰청에 등록된 탐정 관련 단체는 총 69곳이다. 이중 31개 단체는 작년 11월 23일 기준 탐정 관련 민간자격증 34개를 발급하고 있다. 이 기간까지 탐정 관련 민간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은 1만3205명이다.

탐정 관련 자격증을 발급하고 있는 31개 단체 중 한 곳인 대한탐정연합회에서 발급한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은 2019년 8월부터 현재까지 1748명인데, 이중 80% 이상은 전직 경찰관이거나 퇴임이 3년 이내로 남은 현직 경찰관이다. 탐정업과 관련한 교육을 이수해 자격증을 딴 사람 대다수가 전·현직 경찰관인 셈이다.

실제 인터넷에는 ‘경찰 출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는 탐정사무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탐정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관련 교육을 이수했던 A씨는 “같이 교육을 받으면서 친해지다 보니 총경 출신 경찰관들이 굉장히 많았고, 현직 검찰 수사관까지 봤다”며 “다들 공공연하게 ‘나중에 탐정사무소를 차리겠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경찰관이 은퇴 후 진로로 탐정을 선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쌓은 수사 및 증거수집 등 각종 노하우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 탐정이라고 입을 모은다.

은퇴 후 진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도 전·현직 경찰관들이 탐정에 관심을 갖는 주요 이유 중 하나다. 경찰관은 퇴직 이후 경비원으로 일하거나 행정사 또는 학교폭력 예방요원 등으로 일한다. 법무사·로펌 등에서 일할 수 있는 법원·검찰 공무원들과는 차이가 있다. 일각에서는 경찰청 차원에서 퇴직 경찰관들의 인생 2막을 위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선 경찰서장을 지내다 총경으로 퇴임한 정수상 대한탐정연합회장은 “판사·검사와 달리 경찰관은 은퇴하고 제2의 진로가 확보돼 있지 않다”며 “퇴임한 경찰이나 퇴임을 앞둔 경찰관들이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탐정업계에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찰 지휘부도 현직 경찰만 생각할 게 아니라, 퇴임하는 경찰관들의 사기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증거 싸움’으로 승패 갈리는 재판… “탐정업 전망 밝다”

전·현직 경찰관들은 향후 탐정업 전망이 밝다고 보고 있다. 공판중심주의로 바뀌면서 탐정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 개정에 따라 올해 1월부터 피고인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가 사실과 다르다는 수준의 의견표시만 하면 판사는 조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결국 재판은 누가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느냐 여부로 승패가 갈리는데, 채증을 위해 탐정을 찾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란 분석이다. 소송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은 변호사가 상대방보다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탐정을 고용하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일러스트=정다운

또 탐정이 치안공백을 해소하게 되면 경찰과 공생관계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작년 10월 이후 스토킹 범죄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탐정사무소를 많이 찾고 있다고 업계는 말한다. 스토킹 가해자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경찰관들이 스토킹 피해자들을 24시간 따라다니며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씨는 “전직 경찰관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노하우를 국민을 위한 귀중한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오로지 현직 경찰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데이트폭력, 층간소음, 스토킹 등에 대한 경찰력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직경찰의 활용도는 불문가지”라고 했다.

◇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 “탐정법 제정 시급”

2020년 8월 헌법재판소 판단에 따라 탐정은 합법화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 탐정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을 할 수 있는지 명확한 직무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일을 하는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탐정에 대한 국민 인식도 불법 흥신소와 심부름센터에 머물러 있다.

이에 탐정의 직무범위를 정확히 규정하는 등 탐정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1대 국회에서는 이명수·윤재옥 국민의힘 의원이 ‘탐정업 관리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1999년에는 하순봉 당시 국회의원이 ‘공인탐정에 관한 법률’을 처음으로 발의했고, 17~20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매번 발의됐으나 회기만료에 따른 자동폐기 등으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그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인탐정 제도를 공약으로 내세웠다./연합뉴스

탐정 자격을 민간 자격이 아닌 공인 자격으로 격상하고, 주무부처인 경찰청이 자격을 갖추지 못한 각종 탐정 단체들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 회장은 “흥신소도 자기들이 탐정이라고 하는 등 중구난방인 상태”라며 “주무부처인 경찰청이 제대로 된 관리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씨는 “경찰청에서 탐정법 통과 등을 추진하면 좋을 것”이라며 “예비 경찰격인 탐정을 많이 만들어 다각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탐정법의 조속한 통과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경찰청은 현재 발의된 이명수·윤재옥 의원 법률안의 주요 골자인 공인탐정 제도를 토대로 정책 추진에 나설 방침이다. 이 후보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탐정제도가 없다”며 “공인탐정 제도를 통해 국민에게 안전한 사실조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했다.